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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19. 2024

 이시다 미츠나리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당선작  <조선  활자공  임오관,  평화를  만들다>


“강항 선생께서 귀국하시고 몇 달 뒤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를 보라. 전투 개시 전부터 저 많은 다이묘들과 사무라이들이 조부께 무릎을 꿇거나 숨죽이고 관망하지 않았더냐!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 놈 집안의 필두집사(筆頭執事)나 다름이 없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그토록 애절하게 애원했는데도 말이다!”


쇼군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탕!’ 소리가 나게 때리며 호되게 외치셨다.


좌중이 더욱 깊이 고개를 수그리고 숨소리마저 죽였다.


“그러니 명나라군과 조선군이 하시바를 응징하겠다며 이 땅에 상륙했다면 수많은 다이묘들과 사무라이들이 그들 편에 서거나, 제 성에 틀어박혀 형세나 관망하지 않았겠느냔 말이다! 주군을 향한 충성심이란 게 약에 쓸래도 없으니까 말이다! 고로 후지와라 선생의 발언은 망언이 아니다! 우리가 다스리는 이 일본의 현실을 준엄하게 판단하고 꾸짖으신 것이다!”


일제히 “예, 쇼군!”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쇼군께서는 당신 말씀을 하타모토(旗本: 도쿠가와 막부의 상급 가신)들이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속으로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음을 꿰뚫어보시고 다음과 같은 가르침도 내리셨다.


“그리고… 다들 떠올려보라! 하시바가 텐카닌(天下人: 일본의 지배자) 행세를 하던 동안 이 나라에 선정(善政)이라도 베풀었는가? 100여 년에 걸친 전국시대가 끝났으니 요 임금과 순 임금이 다스릴 때의 명나라 백성들처럼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 믿던 백성들을 조선과의, 명나라와의 전쟁에 몰아넣은 게 누구란 말인가? 바로 하시바가 아닌가! 그러니 조부께서 하시바가 지옥에 떨어지자마자 그놈의 남은 일족까지 징벌하시겠다며 떨쳐 일어나신 게 아닌가! 그렇다! 조부께서는 임오관의 처 시노부 같은 여인들의 한을 풀어주시려고 일어나신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쇼군! 더군다나 미츠나리 그놈은 조선의 행주산성에서 심한 치욕을 당하기까지 했던, 하시바 놈을 위해 조선에 출병했던 자, 이에야스 님께서는 조선 왕이 보낸 통신사들에게도 말씀하셨듯이 조선 백성들을 위해서도 칼을 드신 겁니다!”


쇼군의 의중을 읽었는지 사토 공은 이 발언으로 맞장구를 쳤다. 임오관을 향해서 말이다.


역시나 임오관이 사토 공의 발언에 감동했는지, 사토 공을 향해 미소를 살짝 내비쳤다.


쇼군의 가르침은 계속 이어졌다. 그 말씀은 후지와라 선생과 임오관이 함께했던 서적 출판 사업이 우리 일본에 얼마나 중요하고 요긴한 일인지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하타모토들을 질책하기 위해서였으리라.


“부끄럽게도 우리 일본인들은 조부께서 세키가하라의 승리를 취하시기 이전까지 수백 년간 칼부림을 계속했다. 특히 가장 최근의 100여 년간이 백미였지. 그 결과 주군과 가신이, 아비와 아들이, 물론 부부간이나 벗이라는 자들 간에도 서로를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부보다 먼저 천하통일을 달성하실 뻔했던 오다 노부나가 공께서 혼노지의 변을 당하신 것도, 흉적(凶賊) 아케치 미쓰히데가 애당초 오다 노부나가 공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을 뿐, 그분을 위해 제 목숨마저 바치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어서였다. 노부나가 공의 신발을 자기 몸으로 덥혀 총애를 받았다는 하시바 놈을 봐라! 혼노지의 변이 있은 뒤에는 오다 가문의 모든 걸 빼앗지 않았느냐!”


쇼군께서는 열변을 멈추시고 하타모토들을 하나씩 천천히 노려보셨다.


그 행동이 마치 우리의 마음속을 차근차근 꿰뚫어보시는 듯해서, 우리 마음속에 하시바가 있는가를 탐색하시는 듯해서 우리 모두 어부 앞의 자라마냥 몸을 움츠리고서 온몸을 떨었다.


다만 임오관만은 태연했다. 아마 조선인이고, 일개 공장(工匠: 기술자)이어서였으리라.


다행히 쇼군의 의심을 산 자가 없어서인지 쇼군은 하시던 말씀을 이으셨다.


“조부께서는 칼과 총으로 하시바 놈의 일족을 멸문시키셨으며, 이로써 당신의 사돈이신 노부나가 공의 천하를 대신 수복하시면서 텐카닌이 되셨다. 허나 조부께서는 ‘칼로 천하를 취할 수는 있어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간언과 ‘학문으로 지배하셔야 합니다!’라는 간언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쇼군은 임오관을 향해 고개를 돌리시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우리 일본의 보물일세. 조부께서는 학문으로 일본을 다스리시기 위해 자네 같은 조선인 인쇄공들에게 주목하셨고, 크게 쓰셨으며, 과인 또한 그래왔네. 다른 다이묘들이 사치품인 조선산 도자기에나 탐닉할 때 조부께서는 그런 원대한 이상을 품으셨지.”


쇼군께서 씩 웃으시며 좌중을 돌아보시자, 어느 눈치 빠른 하타모토가 발언했다.


“그렇습니다, 쇼군! 그러니 이에야스 님께서 텐카닌이 되신 거지요!”


“그렇다! 과인도 치세를 시작하던 때에는 조부께서 은퇴하시기 전까지 하셨던 것처럼 총과 칼을 썼다! 하지만 일본 땅 안의 모든 이들이 도쿠가와 가문에 복종하게 된 이상, 앞으로는 조선처럼 학문을 융성하게 하여 국가를 안정시키고 번영시킬 것이다!”


쇼군께서는 다시 임오관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아까 사토가 모두에게 환기시켰듯, 이는 조선과 우리 일본의 평화로운 관계를 지속하기 위함이기도 하네.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앞으로도 평화롭다면 아마 조선에 남아있을 자네 자손들도 평안하게 살지 않겠는가. 그리고 말일세. 만약 자네가 더 이상 이 나라에 없다면 자네의 처조카들과 제자들도 막부의 후원과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될 것이야! 그래도 조선에 가야겠다면, 과인이 쓰시마의 도주(島主)에게 명해서 자네를 조선까지 태워주라 하겠네.”


쇼군의 하문에 임오관은 상당히 오래 침묵했다.


임오관의 마음속 누군가는 ‘흥! 고작 그런 조건으로 제 몸을 잡아둘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반문했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거부하자니 너무나 크고 좋은 조건이다. 받아들이자!’라며 그 누군가를 열심히 설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쇼군께서는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려라!’라는 초대 쇼군(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말씀을 좇으셨기에 임오관에게 당장 답을 내놓으라며 억압하지는 않으셨다.

 하긴 그런 건 하시바 같은 소인배나 할 짓이니까.

쇼군께서는 임오관이 더욱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도록 작은 도움도 주셨다.


“자네는 처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얻지 못한 대신, 처조카들을 친자식들처럼 여겼다더군. 그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말해주겠나?”


쇼군의 하문에 임오관은 대놓고 씁쓸해했다.

 ‘다 전해 들으셔서 아실 텐데요?’라고 반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감히 쇼군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이실직고하기 시작했다.


“소인이 가장 열심히 가르친 일본인 제자가 바로 처남이었습니다. 처남은 남만인(南蠻人: 서양인)들에게서 차별을 당하면서도 어떻게든 그들의 기술을 배우려고 ‘한때는 기리시탄(キリシタン: 기독교인)인 척 했을 정도로’ 열정이 있었으니까요! 소인도 시노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고요. 그러다 보니 처남과 공동 작업까지 차근차근 하게 됐죠. 그런데 류는 언제부턴가 나라의 사업보다 제 돈벌이에 더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아하, 기리시탄들과 어울렸던 몹쓸 과거가 떠올라 괴로워하며 술과 담배의 양이 부쩍 는 뒤부터였던 것 같네요. 아니, 소인이 조선에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제작했던 공장을 소개시켜준 뒤부터였나 싶기도 하고요.”


“흠, <삼강행실도>? 끝에 ‘도(圖)’ 자가 들어가는 걸 보니 그림인가 보군?”


“예, 쇼군. 언문으로 집필된 그림책입니다. 조선은 물론 명나라에도 있던 충신, 효자, 열부(烈婦)에 관한 이야기책이기도 하고요. 세종대왕께서 백성들에게 충성심과 효심 같은 유교의 덕목들을 가르치시려고 만들게 하신 책입니다. 그래서 글도 있지만, 그림이 많죠. 어수룩한 백성들이 관심을 가지게 하면서 저절로 깨우치게 해야 하니까요.”


쇼군의 얼굴에는 ‘대단하다, 대단하구나, 세종대왕!’이라는 외침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삼강행실도>에 의구심을 품으신 것 같았다.




<삼강행실도>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300620&code=kc_age_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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