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은 장르를 불문하고 당하고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다. 오늘 하루만 스무 통이 넘는 통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을 보여주겠다고 나서는 집주인은 나오지 않았다. 다양한 알바 경험과 특유의 넉살로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쪽으로는 꽤나 타율이 높은 설득의 달인이라고 자부하며 살아왔건만... 이번엔 그들을 설득할 문장을 찾는 것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며칠 전, 부동산을 찾아온 분은 백발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70이 훌쩍 넘은 할아버지셨다.
부동산에 들어오시자마자 자신이 살집을 찾아 달라며, 얼마 전에 이혼을 했기에 혼자 살 수 있는 집을 찾고 있다며 묻지도 않은 가정사에 관한 TMI를 쏟아내셨다. 엄마는 그분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주신 후, 조심스럽게 현재 상황을 설명하셨다.
아무래도 집을 찾는 것이 그다지 쉽지 않을 거라고.
할아버지는 막무가내셨다. 이 넓은 땅덩이에 집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가 살 곳이 없는 것이 말이 되냐며 말이지. 나도 처음엔 할아버지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설마, 이 동네에 할아버지 한 분 사실 공간이 없을까... 하지만 막상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하고 전화를 돌리다 보니 엄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공간은 있지만,
그분을 받아줄 공간이 없다는 사실을.
대다수의 집주인들은 방 2개 이상의 전셋집이라면 가족단위를, 원룸이라면 젊은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집을 임대하는 것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공간을 아끼며 잘 써줄 '사람'을 찾는 것이기도 하다. 방을 볼 수 있냐는 이야기에 반색을 표하다 나이 이야기에 난색을 표하는 것을 계속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좀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십사 말씀을 드리며 전화를 종료하자 머리가 지끈, 미뤄둔 두통이 한 번에 몰려왔다.
대학시절, 마지막 학기를 학교 근처의 고시텔에서 보냈었다. 학기가 시작하고 나서야 집을 구했던 탓에 학교 앞에 위치한 대부분의 고시원은 모두 만실인 상태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해하고 있을 찰나 친구 녀석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고시텔에 빈방이 있다고 연락을 해왔다. 정문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한 그 고시텔은 보통의 고시원보다는 아주 쬐끔 넓고, 아주 쬐끔 비싼 곳이었다. 친구와 선배가 이미 살고 있었기에 나는 고민 없이 그곳으로 입주하게 되었다.
그 고시텔은 학교 앞 고시원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거주하는 사람들의 층이 조금 넓었다고나 할까? 우리 학교 학생도 있긴 있었지만 나이 든 아저씨들이 대부분이었고, 가족단위로 거주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우리셋은 더욱 똘똘 뭉쳐 다녔다. 선배가 본가에서 차를 가지고 상경하자 우리의 생활은 한층 더 다이내믹해졌다. 나와 친구는 쉴 새 없이 선배의 방문을 두드렸다. 1교시 수업을 지각할지도 모른다고 차를 태워달라고 두드려 대는 것은 기본이고, 장을 봐야 한다고, 드라이브를 가자고 선배의 방문을 두드려댔다. 우리들 때문에 선배는 1교시 수업이 없는데도 수험생마냥 매번 1교시 등교를 하곤 했다. 당시 우리의 진상 짓은 아직까지 회자될 정도였으니... 우리 셋은 고시텔 안에서 조금, 아니 많이 시끄러운 존재로 유명세를 떨쳤다. 돌아보면 그때가 가장 재밌게 학교생활을 했던 시기기도 했다.
우리 셋이 고시텔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있노라면 슬그머니 아저씨들이 나오셔서 이것저것 물으며 말을 걸거나 자신들의 술안주를 슬쩍 우리에게 나눠주시곤 했다. 당시 우리는 어렸고 그분들이 왜 그곳에 있는지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이만한 조건의 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저렴하기도 하고 밥도 제공되는 곳이니까. 하지만 10여 년이 흐른 지금, 당시 우리에게 최선이었던 그곳이 어쩌면 그분들에겐 최선이 아닌 차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당시 우리에게 본인들의 안주를 나눠주시던 그분들은 지금 어떤 공간에 살고 계실까. 문득 그분들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날 밤, 답답한 마음에 영화를 한편 틀고 자리에 누웠다.
중반부에 도달하기도 전에 잠이 들어 결국 결말을 보지 못했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유난히 정신이 없는 날이었다. 급한 일을 겨우 끝낸 후, 달달한 커피 한잔을 들고 자리에 앉았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나 어제 통화했던 집주인인가 싶어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우리 집과는 오랜 친분이 있는 아주머니셨다. 다급히 엄마를 찾으셨는데,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는 말에 아주머니는 울먹이며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