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하지만, 정말로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나는 지방의 기숙형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여느 고등학생이 그렇듯 3년 내내 공부하기 바빴고, 잠깐의 여유가 나도 지방에 위치한 만큼 문화 생활을 즐기기 좋은 여건은 아니었다. 그런 불만을 누그러뜨린 것은 1학년 여름이 끝나갈 때쯤, 학교에서 걸어서 10분 안팎의 거리에 들어선 국내 최대 규모의(용산 CGV가 완공되기 전이었다.) IMAX를 보유했다는 영화관이었다. 지하철도 없는 도시에서 토박이도 아닌 고등학생들의 좁았던 행동 반경은 덕분에 한 폭 늘어났다. 시험이 끝나 갈 때면 다들 복합몰을 찾아 영화를 한 편 보고 맛있는 저녁을 사먹는 것을 인생의 낙 쯤으로 여겼다.
고유명사에 가까운 ‘고삼’이라는 신분이 되고 나서는 그런 여유도 수능에 한 걸음 떨어져 있을 때나 주어지는 것임을, 토요일도 오후까지 학교에 남아 자율학습을 하던 선배들이 신나서 학교 밖으로 내달리는 우리를 왜 조금은 부럽고 조금은 아니꼽게 바라보았는지 깨닫았다. 마지막 여름이 지나 3학년 2학기가 되고 수능이 두 자리 수에 접어 들자 교실은 반쯤 정신 놓은 친구들로 가득 찼었다. 나 역시 제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공부를 제외한 무엇 하나를 시작하려 할 때마다 스스로 망설이고 스스로 눈치를 봐야하는, 몇 살이냐는 질문에 열 아홉이 아니라 고삼이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나를 억죄었었다.
그 때, ‘굿 윌 헌팅’의 재개봉 소식을 들었다. 명작이라는 이야기, 좋은 선생님을 연기했던 로빈 윌리엄스라는 배우가 작고했다는 이야기만 얼핏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유명세에 한 번은 보고 싶었던 영화이기도 했다. 언젠가 봐야지, 미뤄두었던 작품의 재개봉 소식에 9월 모의고사를 앞 둔 어느 토요일 자율학습 시간에 반쯤은 충동적으로 영화를 보러갔다.
영화는 기대했던 것만큼이나 좋았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어 간략히 줄이자면 ‘굿 윌 헌팅’은 정규 교육에서 벗어난 천재이자 반항아, 윌 헌팅(맷 데이먼)이 일하던 대학의 교수가 낸 문제를 누구보다 먼저 풀어내는 ‘터닝 포인트’를 계기로 심리학 교수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엄스)를 만나 변화하고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많은 분야에 재능을 가졌지만 과거의 상처도 함께 가진 윌은 다가오는 사람에게 거리를 둔다. 입양과 파양, 아동 학대까지 반복해 겪은 윌은 사람에게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와 사랑에 빠진 스카일라(미니 드라이버)에게도, 그의 재능을 꽃피우는 것을 도우려는 숀에게도 진심으로 속내를 보이려하지 않는다. 한 걸음 떨어져 윌을 바라볼 수 있는 영화 시청자와 달리 그의 곁에서 날선 말을 들어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윌이 세운 가시는 서로에게 상처가 된다. 그러나 숀은 내민 손을 거두지 않는다. 일부러 자신을 상처 주려는 윌과 싸우고 언쟁 하면서도 그를 구하려 노력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임이 틀림 없는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 역시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스스로 과거의 상처를 덧내고 버림 받기 전에 먼저 옆 사람을 떠나려는 윌에게 숀은 윌이 자책하는 그 어느 것도 그의 잘못이 아님을 말해준다. 윌의 경우엔 불우한 어린 시절일 것이나 보는 이에겐 의도하지 않고 겪었던 다른 아픔에 대한 위로로 다가올 것이다.
자신이 겪은 아픔이 윌이 겪은 고통에 비해서는 너무나 사소해 보여 이런 위로는 과분하다 느낄 수도 있다. 심한 아동학대를 겪은 윌 앞에서 수능의 압박감 따위를 토로하기에는 부끄럽다. 그러나, 숀은 아픔의 경중을 가려 사람을 위로하는 선생님이 아니다. 개인에게는 개인의 아픔과 울분과 속상함이 있다. 그 아픔에 크고 작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진행중인 슬픔의 안에서 이를 저울질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지금은 단지 스스로를 토닥이자 영화는 이야기한다. 우선은 자신을 감싸주자. 내가 지금 남의 가슴의 큰 상처보다도 내 손끝의 작은 가시를 아프게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너무 철없고 어리지 않은지 고민하게 된다면, 그조차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넉넉한 애정과 포용력을 담았기에 아직도 수많은 이들을 위로하는 영화로 굿 윌 헌팅이 손꼽히는 것일 테다.
자기연민에 빠져 남을 상처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숀의 아내를 들먹이며 그를 상처주려는 윌을 제지함으로써 자기연민에 젖어 타인을 공격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음을 확실히 한다. 대신 굿 윌 헌팅은 소중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라 그 방법을 보여준다.
윌의 또 다른 구원자는 그의 오랜 친구, 척키 슐리반(벤 애플랙)이다. 척키는 범상치 않은 머리를 가지고도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의지가 없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복권 당첨번호를 쥐고도 돈으로 바꾸기 두려워하는’ 친구의 새로운 출발을 간절히 바란다. 망설이는 윌에게 행동하라 몰아붙인다. 또한 그로 인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다시 돌아온 집에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마음으로 전한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도 이런 마음을 가득 담은 척키의 대사다.
윌은 파양을 반복해서 겪었다. 몸에 남은 학대의 흔적보다도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파양으로 인한 정신적인 상처가 더 컸을 것이다. 그래서 척키는 언제고 윌의 집 문을 두드리겠다고 말한다.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난 뒤에도 그를 기다리겠다고. 그러다 언젠가 못다한 작별의 말 대신 재회 인사를 하리라 믿는다고.
영화 후반, ‘꼭 만나야 할 여자가 있어’서, 그녀를 찾아 떠난 윌의 집 앞에서 그의 부재를 확인한 척키는 결국 웃는다. 진정한 친구는 슬플 일에 함께 울어주는 친구보다도 기쁜 일에 함께 웃어주는 친구라는 말이 있다. 남의 불행을 함께 슬퍼하기는 쉬우나 남의 행복을 함께 축하하기는 어렵기에 나온 말일 것이다. 척키는 윌의 엄청난 행운 앞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소중한 친구의 행복을 소중하게 바라보며 축복한다.
수능을 앞두고 주위의 친구가 친구보다도 경쟁자에 가깝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친구는 바라기만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상대에게 손 내밀 때, 진심으로 상대의 행복을 바랄 때 자신의 행복을 빌어주는 사람도 생기는 것임을 영화는 알려준다.
기획 칼럼의 주제는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영화’였다. 엄청난 전환점을 겪을만큼 오래 살지도 않았거니와 하나의 작품이 인생을 얼마나 바꿀 수 있겠나 싶어 주제를 정하면서 다소 회의적이기도 했지만 나를 조금은 바꿔 놓았던 영화 중 한 편을 골라보았다. 수능을 백일도 안되게 앞두고 자율학습을 째고 달려갔던 영화관에서 나는 그 때 내게 필요했던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좋은 어른, 좋은 친구, 그리고 다정한 위로. “네 잘못이 아니야.” 미친 입시판(이라 믿었던) 속에서 내게 간절했던 것들이었다.
우리가 윌은 아니니, 그처럼 숀과 척키를 만나리라 낙관할 수만은 없다. 꿩 대신 닭이라고, 이 영화를 감상하며 대리 만족할 수도 있긴하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에게 숀이자 척키가 되어주는 것이다. 숀이 그랬던 것처럼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자신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두 팔로 자신을 껴안고, 머리도 쓰다듬어 가며. 그렇게 버텨가는 것이다.
나는 결국 고등학교 3년을 마치고 진학했던 학교에 만족할 수 없어 반년을 더 공부하고 나서야 대학 입시생을 탈피한 대학생이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학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원하는 학교에, 원하는 학과에 합격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러지 못해도, 그럴 수 없어도, 그것은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다. 정정하겠다. 이 글을 읽는 모든 학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자신을 용서했으면 좋겠다. 이런 영화를 이런 식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었던, 내 손끝의 가시가 남의 피흘리는 가슴보다 아팠던, 숫자와 성적과 등수의 강박에 빠져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진정한 친구가 되어줄 여유도 없었던 스스로를 토닥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 이 글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영화>를 주제로 기획된 릴레이 칼럼입니다.
1.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영화 : 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 - 본 글
2.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영화 :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3.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영화 : 월 플라워(Wall flower)>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