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멘붕에 대처하는 자세
원고를 중반정도 쓰던 중에 문득 '내가 잘 가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어찌 분량을 채워가며 쓰고는 있었지만, 처음 가는 길이었기에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건지, 이 방향이 맞는 건지 혼란스러웠죠. 예전에 어디선가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건 '원고를 객관적으로 읽고 조언해 줄 내 편'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원고의 마무리와 최종 책임은 작가가 지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원고를 진정성 있게 읽고, 느낀 부분을 이야기해 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지요. 제게는 그 존재가 편집자님이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편집자님은 여러 책을 동시에 핸들링하기 때문에 많이 바쁜 편입니다. 그래서 행여나 이렇게 중간 조언을 구하는 것이 추가 업무를 얹는 건 아닐지 걱정되긴 했지만, 절실했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돌아온 편집자님의 답신, 피드백 주신 내용을 보며, 역시 의견 구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부분이 제가 전혀 생각지 못한 조언이었기 때문이죠. 아무래도 작가는 원고를 직접 쓰는 사람이기에, 어느 순간 판단력을 잃고 원고 안에서 헤매는 때가 올 수 있습니다. 그때 이렇게 객관적인 조언을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큰 도움이 됩니다(때로 자칫 부산으로 갈 뻔한 경로를, 강원도로 수정하게 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 조언을 받아들이고 말지는 작가가 결정하는 것이지만요.
피드백을 받고 도움은 크게 되었지만, 동시에 고쳐야 한다는 생각에 멘붕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편집자님으로부터 받은 피드백 중, 시급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1. 조언 부분이 너무 길다는 것
전반적으로 원고에서 조언 분량이 좀 길다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물론 좋은 말을 해주고 싶다는 의도는 좋지만, 자칫 좋은 말도 길게 들으면 잔소리가 될 수 있다면서요. 조언 비중이 좀 줄면 더 좋을 것 같다며, 행여 제 기분 상할세라 조심스럽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차' 싶더군요. 전혀 생각지 못했던 포인트였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빠짐없이 전달하고 싶은 욕심에 벌어진 대참사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원고를 다시 들여다보니 지시적인 어투가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해야 한다' 투의 말이 무언가 정답을 강요하듯 느껴지거나 교훈을 주입하는 것처럼 생각되더군요. 아무리 좋은 말도 길어지면 잔소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너무도 잘 이해가 되었고, 더 늦기 전에 방향 전환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체적인 원고 톤에서 지시적이라 느껴지는 어투를 최대한 덜어내고 독자가 판단할 수 있게끔 쓰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2. '첫째, 둘째, 셋째~'의 순번 나열이 많다는 것
네 가지 이상의 항목일 경우 이렇게 순번별로 단락을 나누어도 괜찮으나, 그 미만은 문단만 달리해서 문장으로 풀어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다시 원고를 들여다보니, 정말로 대부분의 글이 그렇더군요. 이를 때면 '~하는 세 가지 방법, ~하는 두 가지 이유' 등으로 내용을 전개하는 것이 완전히 습관화되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브런치에 글을 쓸 때도 습관처럼 순번을 매기는 편이었습니다. 직장에서 보고서 쓰던 습관이 남아있기도 하고, 왠지 그렇게 해야 깔끔하고 정리가 되는 듯한 느낌에 더 그렇게 되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이런 작성 방식이 정보 전달에 효과적이라 생각하기도 했고요. 물론 이렇게 카테고라이징이 되어 있으면 내게 필요한 부분만 쏙쏙 취하기가 쉽습니다. 보통 온라인상에서 글을 읽을 때 후루룩 읽어내리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종이책, 특히 장르가 에세이일 경우는 달랐습니다. 너무 과하게 카테고라이징이 되어 있으면, 책에서 단락 사이 빈 공간이 많아지게 되어 자칫 맥락이 뚝뚝 끊길 수도 있다는 점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죠.
이외에도 편집자님의 조언을 듣고 원고를 다시 보니, 뜯어고쳐야 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크게 문제가 되었던 지시적인 부분을 덜어내고, 카테고라이징했던 단락 사이 이음새를 붙이다 보니 원고의 분량도 현저히 줄어들었죠. 이미 상당 부분 완성된 원고를 덜어내고 다시 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부족한 부분은 더 많은 에피소드로 채워야 할 것이 분명해 보였고요. 이전에도 브런치 글을 원고로 갈무리하던 와중에 에피소드가 부족함을 절실히 느꼈는데, 추가로 더 많은 에피소드가 필요해진 상황이었습니다. 문제는 완성 원고를 전달해야 하는 날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는 거죠. 갑자기 여유롭다고 생각했던(중간 피드백 원고를 전달할 때만 해도) 작업 일정이 발등에 불 떨어진 촉박한 일정으로 바뀌었고, 조급해진 마음으로 원고를 다시 써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원고의 많은 부분을 도려내고 다시 쓰는 작업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공들여 썼던 부분을 날려버리는 게 아깝기도 했고, 새로 써나가야 할 백지가 큰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기도 했지요. 원고를 쓰며 자꾸 조급해지고, 부정적으로 전환되려는 마음을 다잡는 게 필요했습니다. 의식적인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 했습니다. 온갖 긍정회로를 돌려보았고, 그중 가장 도움이 되었던 생각은 '지금이라도 문제를 알게 되어 다행이고 감사하다'입니다. 이미 인쇄되어 출간이 된 이후에는 돌이키기 쉽지 않은데, 그래도 완성되기 전에 수정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라도 고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셈이니까요. 편집자님 역시 중간중간 조언을 많이 구하는 편이 낫다는 말을 해주셨고요. 오히려 묻지 않고 혼자만의 방식으로 진행하다가 정작 본격적인 편집 작업 때 많은 부분을 손대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 경우에는 완성 원고를 넘기고 난 이후, 초반처럼 덩어리가 큰 수정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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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원고 작업 중에, 모든 걸 뒤집어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리셨나요?
(물론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때 이렇게 마인드 컨트롤 하시면 마음이 좀 편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