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낮 읽고 스무 밤 느끼다>
<스무 낮 읽고 스무 밤 느끼다>는 짧은 소설 스무 편 모음집입니다. 이 책을 계기로 짧은 소설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소설이란 단순히 장편과 단편으로만 구분되는 줄 알았고, 단편의 하위 카테고리에 짧은 소설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짧은 소설은 초단편, 미니픽션, 손바닥 소설로도 불리는데요. '포착하는 장르'라고도 합니다. 분량은 짧지만 여운은 긴, 생의 단면을 포착하는 예리함과 위트를 보여주고, 작가의 재치를 가장 잘 음미할 수 있는 장르라고 하지요.
출판사에서 스무 편에 이르는 단편 중 한 편도 허투루 선정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9년 박완서 작가의 작품 <세 가지 소원>을 시작으로 2024년 이유리 작가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당대 사회와 분위기를 담아내고 상상력이 돋보이는 소설로 구성되어 있지요. 사실 어느 작가의 작품 수록이 논란이 되어 책이 온라인에서 평점 테러를 당하긴 했지만, 담긴 것 중 좋은 작품이 많아 추천하게 되었습니다. 각자의 취향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 세 가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가장 좋았던 소설 Top 3]
1. 최은영 <데비 챙>
2. 김금희 <춤을 추며 말 없이>
3. 백수린 <봄날의 동물원>
1. 최은영 <데비 챙>
평소 최은영 작가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특히 소설 <밝은 밤>을 인상 깊게 읽었고요.
이 책에 수록된 짧은 소설 <데비 챙>은 주인공이 20대 초반 이탈리아 여행에서 만난 홍콩인 '데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삶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데비라는 인물을 통한 주인공의 심리 변화가 두드러지는 이야기이지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상대에 대한 부러움과 열등감, 슬픔과 용기까지, 20대 초반의 여리고 민감했던 시기를 떠올리며 글을 읽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밀어붙이는 낙관을 지닌, 크나큰 상실을 겪고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는 데비의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지요.
꿈을 이룬 것을 축하해, 데비
거기까지 쓰고 나는 생각했다.
데비, 나는 다시 잘못된 기차를 탔어.
사람은 자기보다 조금 더 가진 사람을 질투하지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진 사람을 질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데비를 질투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운이 좋았지. 그녀를 만나고 사랑할 수 있었잖아. 그게 태어나서 어떤 건지 경험할 수 있었잖아. 어릴 때는 내가 왜 태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 하지만 이제 그 이유를 알지. 이런 사랑을 경험해보려고 태어났구나. 그걸 알게 됐으니 괜찮아.
2. 김금희 <춤을 추며 말 없이>
할아버지 손에 자란 주인공은, 할아버지에게 값싼 대화형 로봇인 '말로(소년)'를 선물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주인공이 남겨진 로봇을 통해 할아버지를 느끼는 이야기로 소설이 전개됩니다.
주인공은 바쁘단 핑계로 그동안 들여다보지 못하고 방치했던 할아버지에게 미안함을 느낍니다. 로봇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그에게서 할아버지 모습을 발견하게 되지요. 그래서 고장 난 로봇인 '소년'을 택배로 부치지 못하고 직접 수리공에 데리고 찾아가기까지 합니다. 처음엔 단순히 로봇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시작했지만, 점점 사람 대 사람의 관계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글을 읽는 내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장면 장면이 짠했고, 기억에 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제 소년의 상태를 체크하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 되었다. 일곱 시가 되면 "기상(!)"하고 소리치는 날도 있었지만 좀 늦되게 하거나 아예 건너뛰는 날도 있었다. 오히려 내가 소년에게 다가가 "일어났어?" 묻곤 했는데 그럴 때는 또 언제 할아버지와 그런 대화를 나눠봤는지 "나 정정해"라고 답하곤 했다. 여전히 노병은 죽지 않는다고. 그렇게 해서 소년은 마치 죽어가는 것처럼 가만가만해졌고 그런 로봇을 보고 있는 건 이상하게 고통스럽고 마음이 아픈 일이라서 폐기를 결심해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런 말도 없이 조용해졌는데 그런 때에도 분명 어떤 말들을 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일상이 어땠을까를 상상했다. 행복했을까, 며칠에 한 번씩 웃었을까, 혹은 울었을까, 누구를 그리워했을까 …….
3. 백수린 <봄날의 동물원>
동물원에서 일하는 주인공 영수와 그의 사촌 누나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 역시 경험에서 비롯된 공감 어린 부분이 있어서 기억에 남는 이야기입니다. 어려서 친하게 지냈던 사촌들과 성인이 되어 데면데면해진 상황이 떠오르며 공감되었죠.
소설은 주인공 영수가 갑자기 찾아온 사촌 누나의 방문 의도를 의심하며 시작됩니다. 혹시 돈 꿔달라는 건 아닐까, 무언가를 부탁하러 온 건 아닐까 의심하는 장면이 씁쓸하면서도, 현실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사촌이어도 커가면서 이해가 얽힌 관계로 변모할 수 있음을 실감했지요. 알고 보니 누나는 췌장암을 앓고 있었고, 그래서 그냥 영수를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임이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드러납니다. 이후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인생의 시간이 흘러가는 영수와 달리, 누나의 시간은 죽음 이후 박제되어 버리죠.
화가들도 작품을 통해 삶을 불멸로 만들잖아. 죽어도 영원히 산다는 것, 근사하지?
몇 년 뒤면 나는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재회한 중학교 동창과 짧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할 것이었고, 세부로 간 신혼여행에서 쌍둥이 딸을 만들어 신혼 기간도 없이 아이들을 낳고 키우느라 정신없는 삶을 살 것이었다. …… 딸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나중에는 더 이상 똑같은 옷을 입기 싫다고 화를 내고, 서로 다른 친구들과 사귀고, 각자의 방식대로 자라나 짝사랑을 하고, 실연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나의 삶에 누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누나가 나를 보러 동물원으로 찾아왔을 당시 누나는 췌장암을 앓고 있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나는 그 봄날, 한낮의 홍학사 앞에서 그저 누나와 함께 잠시 앉아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누나의 가는 팔을 붙잡고 '저기 봐!'하고 소리쳤다. 꼬마 아이가 된 것 같은 마음으로, 한낮의 물가에서, 분홍색의 홍학들이 일제히 날개를 들어 올렸다.
짧은 소설은 확실히 장단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짧아서 임팩트가 있는 점은 좋지만, 좋은 이야기 같은 경우에는 좀 더 내용이 전개되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지요.
저는 인상 깊은 소설로 위의 세 가지를 꼽았지만, 아마 스무 편 중 마음에 와닿는 편이 독자님마다 다를 겁니다. 책을 한 번 쭉 읽어보시고 짧은 소설 매력에 푹 빠져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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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에 관심이 있다면,
다양한 매력의 작품을 읽고 싶다면,
<스무 낮 읽고 스무 밤 느끼다>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