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맞아, 나 직장인이었지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15년 간 쭉 한 회사에서 근무하며 쉬어가는 시기를 겪어 본 적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장기간 휴가를 가야하는 시기가 있었다. 바로 출산 휴가. 생각보다 빨리 태어난 아이 덕에 인수인계나 휴가신청서도 제대로 내지 못 하고 아이부터 낳은 후 부랴부랴 휴가에 들어갔었다. 그리고는 마치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듯이 24시간 육아의 늪으로 빠져들어 현실세계에서 아득히 멀어져 갔더랬다. 출산 후 2개월 반만에 복직을 했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 현업에서 멀어졌던 복학생같은 느낌으로 자리에 돌아와 쭈뼜댔던 생각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겨우 2개월 남짓의 시간은 찰나의 휴가와도 다를 바 없는 짧은 시간이었는데 말이다.
그럴진대 무려 5년,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은 내 전신의 업무 감각 세포를 잠재워놓은 듯 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를 '일 하는 사람'으로 정의하지 못 한다. 어디 가서 나를 소개할 때면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고 소개한지도 오래 되었다.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은 상당히 컸다. 업계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업무들이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그냥 '세상이 무섭다'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2024년 8월 5일 첫 출근.
출근 전날 두근대는 심장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검정색 두꺼운 종이를 펴고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이 그림그릴 때 쓰던 오일 파스텔 상자를 열고 하얀색 파스텔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한정 된 시간과 에너지
"더 가치있는 곳"에 쓴다
v 출근 전 날 "금주
v 6시 기상
v 꾸준한 독서, 글쓰기 유지
v 매일 영어 공부
v 주말은 가족과 충분히
v 체중 유지
다시 워킹맘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한정 된 시간과 체력 안에서 고군분투했던 그 시절의 악몽을 고스란히 소환시켰다. 이렇게나마 적는 것으로 조금은 위안이 되는 듯 했다. 애써 다짐을 굳히며 억지로 잠을 청하며 첫 출근을 준비했다.
"입사를 축하드립니다"
신규 법인 설립이 아직 추진되기 전이라 모기업의 마케팅 부문 수석으로 입사를 했다. 창업을 하려고 했는데, 계획에 없었지만 필요한 과정이 되었기에 얼떨결에 어느 날 갑자기 이직을 해버렸다. 헐렁하고 편안한 동네 옷차림이 아닌 갖춰 입은 복잡이 영 어색하다. 또각또각 구두를 신고 사무실 안을 들어가는 걸음이 어색해 자꾸만 중심을 잃고 휘청인다. '잘 할 수 있어' 스스로 최면을 걸며 태연한 척 사람들과 인사를 하지만 잔뜩 얼어버린 표정으로 고장난 로봇처럼 말을 더듬는다. 사회생활 감각도 잊은지 오래인데, 게다가 이미 잘 세팅되어 돌아가는 회사에 경력직으로 입사하는 경험은 처음이다. 어디가 어딘지, 누가 누군지 낯선 환경에 둘러 쌓여 이리저리 호출을 받으며 불려 다니다 보니 어느 새 나는 다시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어색한 순간들을 몇 차례 버텨내고 조용히 '내 자리'에 앉았다. 신사업 법인의 첫 멤버로 조인했기에 텅 빈 사무실 한 가운데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는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불안함보다는 편안함이, 설레임과 스스로에 대한 만족과 기대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이 속에 차오르는 기분을 느껴본다. 아무 것도 없이 0에서 출발하는 사업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1. 사업계획서 완성 2. 파트너사 섭외 3. 조직 세팅" 이라는 3가지 아젠다를 줄기로 구체적인 액션 플랜을 하나씩 세워보기 시작했다.
맞아 나 직장인이었지. 5년 만에 출근인데 마치 어느 날 갑자기 15년 전으로 타임슬립한 것 같은 기분. 순식간에 정신없이 달리던 그 시절 한 가운데로 툭 떨어져 나도 모르게 언제 쉬었었냐는 듯이 일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15년 차 직장인으로 5년 간 멈춰있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봉인이 해제되고 이제서야 16년 차 직장인으로 돌아왔다. 주는대로 받고 뺐는대로 뺐겼던 순진한 날들. 심각한 번아웃과 세상에 대한 염증으로 꽁꽁 숨어버릴만큼 힘들었었지만, 그러나 난 앞으로도 순진하게 일 할 것이라 다짐해본다. 회사를 만들어 키우는 재미. 신뢰와 성과에 기반한 금전적 기쁨까지 모두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모두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보다 너무 큰 사무실 안에 수십 개의 빈 자리를 바라보며 앞으로 어떤 사람들과 어떤 일로 이 곳을 채우게 될 지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