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책장에는 육아서, 자기 계발서, ADHD관련 서적, 심리 관련 서적, 영어 학습책, 일본어 학습책 등 다양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없는 것이 있네요. 소설책과 시집입니다. 그 흔한 로맨스 소설 한 권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8년이 걸렸네요. 이렇게 많은 책들 사이에 소설 한 권이 없다니, 갑자기 인생이 팍팍하게 느껴집니다.
왜 소설책이 한 권도 없는 것일까요? 많이 부끄럽지만 저의 독서 인생은 초등학교 때 마무리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 공부를 하는 시간 외에는 아이돌 가수들의 열성팬이 되어 책 한 장을 들여다보지 않았지요.
고등학생 때도 독서할 시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쪼개가며 중창단 생활을 했고, 주말이면 중창대회에 나가거나 친구들과 모여서 중창 연습을 했습니다. 물론 열성팬의 생활도 이어졌지요. 수능 직전까지 말이에요.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가 일본 진출을 했다고 일본어에 흥미가 생겨, 정작 중요한 수능 영어는 제쳐두고 제2외국어인 일본어에 열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공부할 시간도 쪼개가면서 다른 일을 했으니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도, 의지도 없었고요.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을 이야기해 보라면 죄다 단편 소설들 뿐입니다. 그것도 초등학생시절 학습지 선생님이 논술지도를 해주실 때 읽으라고 하셨던 단편 소설들이지요. 프란츠카프카의 '변신'과 모파상의 '목걸이'정도가 기억에 남네요.
대학시절에도 전공책을 읽기 바쁘고, 유치원 실습을 다니기 바빴습니다. 사실 바쁘다는 건 다 '핑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냥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늘 인생의 구멍들을 막기 위해 급급하게 살았거든요. 제대로 하는 것도 없는데 매일 시간에 쫓기며 살았습니다.
서른을 넘기고 나서야 흥미가 있는 것에 과몰입하는 저의 ADHD성향을 알게 되었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독서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저희 집에는 책들이 넘쳐 납니다. 과거에 책을 읽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어 정신없이 책을 사들이기 시작했죠. 크고 작은 책장이 4개 이상입니다. 책 읽는 즐거움을 드디어 깨달은 것이었을까요?
제가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이를 키우는 게 너무나 버거워진 순간부터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매일 밤 후회로 범벅이 되어 눈물을 울컥울컥 쏟아내는 저의 마음이 기댈 곳이 필요했거든요.
아이들에게 화를 낸 날이면 잠이 오지 않아 새벽에 육아서를 붙들고 울었습니다. 저의 잘못을 혼내기도 하고, 저의 미숙한 모습까지도 감싸주는, 응원을 해주는 한 문장 한 문장들이 저를 살게 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 되어 저는 육아서들을 미친 듯이 모으기 시작했고, 저와 아이가 ADHD진단을 받고 난 후에는 ADHD와 심리 관련 책들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새로운 꿈이 생기고 나서는 자기 계발서도 챙겨 보았죠.
8년이란 세월 동안 경력이 단절되어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전속력으로 달려야 한다고, 따라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독서의 즐거움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책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유튜브, 글쓰기, 공부, 집안일, 아이들 학습까지 챙기려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랐습니다. 소설이나 시집등을 읽으면서 보낼 시간이 없었지요. 저는 그렇게 사놓은 책을 쌓아놓고 밀린 일기를 쓰듯 꾸역꾸역 읽어나갔어요. 독서노트를 쓰고 글을 쓰는데대부분의 시간을 썼습니다.
몸도 챙기지 않고 뛰기만 하던 저의 건강엔 이상이 왔고, 아이들도 연달아 독감에, 인후염에 거의 한 달이 그냥 날아가 버렸습니다. 어떻게든 루틴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안 좋은 상황 속에서 계획을 지키지 못하니 무력함을 느끼고 우울해질 뿐이었습니다.
2주 동안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평생 책과는 담을 쌓고 지내다가 고작 2주 읽지 못했다고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 우습기도 합니다. 청소를 하다 한동안 읽지 못한 책들이 꽂힌, 먼지 쌓인 책장을 쓰윽 훑어보았습니다.
'정말 소설 한 권 없구나. 진정 나를 위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처량해지기 시작하네요. 빽빽하게 꽂힌 책들의 제목은 가끔 저를 숨 막히게 합니다.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딱딱한 제목들과, 온통 아이들에게 몰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들. 어렸을 땐 이야기책을 보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책 읽기 싫어하던 청소년 시절에도 로맨스 소설은 뚝딱 읽었는데, 왜 지금은 그런 소소한 즐거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소설 한 권, 시집 한 권 안 읽었을 뿐인데 갑자기 인생이 허무해지네요. '책장에 꽂힌 책의 제목을 보면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일까요. 저의 책장만 보면 그저 ADHD아이를 잘 키워보려고 발버둥 치는 성인 ADHD엄마 그 자체입니다.
자신이 읽은 책이 곧 자신이 된다니, 안타깝지만 인정합니다. 저의 감수성은 청소년 시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사실은 글을 쓸 때도 느껴집니다. 나의 경험은 구구절절 잘 풀어낼 수 있지만, 다른 작가님들처럼 풍부한 생각, 다양한 단어, 아름다운 문장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읽은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가족들이 아픈 김에 모든 걸 내려놓고 쉬고 있는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차 한잔 마시며 소설 한 권을 읽을 수 있는 기회. 그러나 저는 또 생각에 잠깁니다. 이제 곧 아이들의 방학이기 때문에 새벽시간을 활용해야 하는데요, 읽어야 할 책들이 잔뜩 쌓여 있어 마음이 급한 제가 소중한 새벽시간을 소설에게 내어줄 수 있을까요? 용기가 안 생깁니다.
사실 두렵기도 합니다. 소설 책 한 권 읽는데 뭘 그렇게 고민할까? 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신중해야 합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일 수 도 있거든요.
한번 몰입하면 걷잡을 수없이 빠져드는 저의 성향 때문에 본능적으로 소설책을 멀리 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유튜브나 드라마를 적당히 보는 것이 어려워 아예 끊어 버린 것처럼 말이에요. 소설을 읽다가 재밌으면 소설책을 한 트럭 살 수 도 있거든요. 이럴 땐, '모 아니면 도'의 극단적인 인생을 사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김익한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늘 공부책과 친구책을 함께 읽으라고, 휴식이 되게 해주는 친구 같은 책을 항상 가지고 다니라고 말이에요. 그 말씀을 듣고 끄덕이며 다짐했음에도 아직 진정한 친구책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친구책이라고 고르는 것도 자기 계발서인 것을 보면 저는 아직 마음이 편하지 않은가 봅니다. 물론 친구책이 꼭 소설이나 시집일 필요는 없지만, 조금 더 여유로운 친구를 만나고 싶네요.
여러분의 친구책은 무엇인가요? 차 한잔 마시며 소설을 읽는 삶, 시를 읊는 삶을 살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저에게도 그 기쁨을 전해주세요. 소설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저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여러분에 곁에 있는 친구책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 보세요. 여러분의 삶을 더 풍요롭게, 따뜻하게,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소중한 존재니까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다짐해 봅니다.
그동안 쌓아놓은 책을 밟고 일어서려 했던 것을 반성합니다. 진정으로 책을 즐기지 못했지요. 책을 숙제하듯 읽는 것이 아닌, 책 속에 파묻혀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나에게 책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찬찬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