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Y 캐슬>에는 또 다른 캐릭터가 있다. 김혜나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누구보다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남들 위에 서기 위해 정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쉼 없이 달리던 그녀의 숨은 생각보다 이른 지점에서 멈췄지만, 그녀의 집념만큼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나는 그 안타까운 고등학생 혜나에게 유독 마음이 갔다. 돈은 없었지만 학원은 다녀야 했던 그녀, 자신의 성적표를 들고 가 학원장과 단판을 짓고 수강권을 들고 온 그녀. 그 당당한 태도, 목적을 위한 막힘없는 전진이 멋있었다. 그리고 한숨이 나왔다. 나는 왜 그녀처럼 조금 더 당당하지 못했나 하고.
내가 다니던 중학교엔 공부에 목숨을 거는 애들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만 열심히 하면 손쉽게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다 1학년 2학기 기말고사에서 반 1등을 하고 말았다. 전교 등수로 치면 그리 만족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반 1등이 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때부터 공부에 집착했던 것 같다. 아니, 공부보다는 등수에 집착했다.
그저 선생님들이 외우라고 하는 것을 열심히 외웠을 뿐인데 등수가 잘 나왔다. 2학년 때엔 반 1등이 어렵지 않았고, 3학년 때엔 당연한 결과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해졌다. 영어나 수학 같은 과목은 무작정 외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기초가 닦여 있어야 응용이 가능한 학문인데 나는 기초가 없어, 조금만 문제가 어려워지면 금세 헤매곤 했다.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 강의나 유튜브 무료 강의가 잘 없던 시절이라 묵묵히 혼자 공부를 하거나 학원을 다니거나, 그도 아니면 EBS 강의를 열심히 들어야 했는데 그 방법으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가령 영어에 관계대명사는 왜 that 인지, 왜 관계대명사가 중요한지 그런 것들을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관계대명사 that이라고, 외우라고, 그렇게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가로막아 혼자서 공부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
중학교 3학년이면 어느 고등학교를 갈지 대충 정해진다. 당시 내가 가려고 했던 학교는 동네에서 공부를 꽤나 한다는 애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학원행을 결심했다. 보통 결심으론 어른들을 설득할 수 없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을 굳게 먹고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는 내게 지금도 잘하고 있는데 굳이 학원을 다녀야 하겠냐고 물었지만, 나의 단호한 태도에 예상보다 쉽게 허락하셨다. 그렇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학원을 등록했다.
학원은 너무나 재미있는 곳이었다. 모르는 문제를 알아가는 즐거움도 있었고,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과 나가 떡볶이를 먹고 들어오는 것도 재미있었다. 짧은 쉬는 시간을 열심히 놀다가 혹여나 늦을까 급하게 뛰어 교실로 들어가는 것조차 신이 났다. 늦은 시간까지 함께 모여 공부를 하는 게 너무 좋았다.
배울수록 아는 것들이 많아졌고 풀 수 있는 문제가 늘어났다. 문제집을 사면 1~2문제를 빼고 다 정답을 맞았다. 문제집을 풀다가 도저히 방법을 알 수 없을 땐, 학교 선생님을 찾아가 묻기도 했다. 선생님은 한참 그 문제를 쳐다보다가 다음 쉬는 시간에 오라고 했다. 나는 점점 내가 똑똑해져 가는 걸 느꼈다. 그게 좋았다. 신이 났다. 이렇게만 하면 지방 국립대는 갈 수 있겠다 싶어 졌다. 국립대가 아닌 대학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안타깝게도 그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학원에 다닌 지 2개월인가 3개월이 되었을 때쯤, 이제 학원에 그만 다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계에 부담이 크다는 이유였다. 화가 났다. 당시 개인택시를 가지고 있던 아빠, 하루 이틀만 더 일하면, 밖에 나가 친구들과 술 한 잔을 안 마시면 충분히 내 학원비 정도는 해줄 수 있을 텐데, 아빠는 딸의 장래보다 자신의 술값이 중요한 듯했다.
적은 생활비 때문에 딸들이 보내온 개인 용돈까지 생활비에 보태 쓰시던 할머니는 손녀의 공부 욕심을 부담스러워하셨다. 하지만 나도 쉽게 포기할 순 없었다. 처음에는 떼를 썼다. 그리고 대들었다. 하지만 이내 받아들였다. 나는 힘도 돈도 없었다.
학원 수업 마지막 날, 원장실을 찾아가 학원을 그만두겠노라고 말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원장님은 내게 그 이유를 물었다. 수업을 빠지는 것도 아니고 성적도 잘 받는 애가 갑자기 학원을 그만두겠다니 그 이유가 정말 궁금하신 듯했다. 무엇보다 그 이야기를 하는 내 표정이 말이 아니었을 거다.
원장님과 마주 앉아 한참을 주저하다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말 한마디에 눈물 한 방울, 또 한 마디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들던 원장님은 단호하고도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유가 그거야? 그럼 그냥 다녀. 나중에 형편 좋아지면 그때 학원비 내면 돼. 걱정하지 말고. 내일 수업 빠지지 말고. 숙제도 꼭 해오고!"
감사했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집에 돌아와 학원에서 들은 이야기를 꺼냈고 다시 학원을 다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위축이 됐다. 나보다 공부를 못하고 수업도 잘 빠지는 애들도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원비를 내주는 그 부모들을 가지고 싶었다.
한 달이 지나고 아빠는 다시 내게 봉투를 건넸다. "돈 내고 배워!" 기분 좋게 학원비를 내고 다시 수업을 들은 지 또 한두 달. 결국 나는 학원을 그만뒀다. 또 한 번 원장실에 앉아 울 순 없어서.
생각보다 고등학교엔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더 많았다. 1학년 때까진 곧잘 따라갔는데, 점차 격차가 벌어졌고 나는 지방 사립대, 소위 지잡대라고 불리는 그런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부족한 돈은 작은오빠가 마련해줬다. "가족 중에서 한 명은 대학에 가야 하지 않겠냐"며.
그 후 나는 장학금과 아르바이트, 학자금 대출로 학비를 댔다. 그리고 남는 시간엔 술을 마셨다. 내가 번 돈으로.
일곱 번째 학기를 마치던 2012년 8월. 나는 4.25 학점으로 대학을 조기 졸업했다. 그리고 그제야 영어 공부, 취업 공부를 해보겠노라고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필리핀 어학연수였다. 3달에 400만 원 정도였는데 몇 달간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들뜬 마음으로 부모님께 내 계획을 설명했다.
엄마는 말했다.
"부모가 되어서 도와주진 못해도, 니가 벌어서 간다 카는데 무슨 이야길 하겠노. 엄마가 다른 건 못 해줘도 밥은 먹여줄 수 있으니까. 기왕 마음 묵은 거 열심히 해봐라."
엄마는 그런 사람이다. 나를 좋아하지만 내 삶에 간섭하지 않고, 나를 신경 쓰지 않는 듯 하지만 언제나 내 밥상을 차리느라 허리를 숙였다. 누구보다 나를 아꼈고 자랑스러워했으며, 나를 응원해줬다.
문제는 늘 그렇듯 아빠였다. 그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돈과 관련된 문제엔 냉정했다.
"안 돼. 한 번 안 된다카면 안 되는 줄 알아. 다신 말도 꺼내지 마."
그래, 한 번에 허락을 받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괜찮았다. 며칠 후 다시 아빠의 기분 상태를 파악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엄마도 거들었다. 하지만 반응은 더욱 차가웠다.
아무리 내가 벌어가는 유학이라고 해도, 계획한 돈을 모으기까진 그 집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가시나가 진짜 겁대가리 없이. 하고 싶다는 거 다 하게 해 주니까 끝이 없어. 야, 이 새끼야. 가족 중에 대학 나온 사람이 누가 있노. 너거 오빠들은 한 명도 대학 못 갔는데 니는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보내줬더니, 대학 다닌 거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뭐 이제 유학을 가겠다고? 유학? 남들 다하는 건 그래 하고 싶나. 니가 벌어서 간다 캐도 그동안 밥은 누가 먹여주고 세금은 누가 내는데. 얼른 벌어서 생활비 낼 생각은 안 하고. 그리고 니 학자금 대출받은 거는 우얄낀데. 나는 그거 때문에 밤에 잠이 안 와. 하루빨리 돈 벌어서 갚을 생각은 안 하고. 뭐? 유학을 가. 이게 보자 보자 카니까."
다시 깨달았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내가 용돈을 벌어 쓰며 까먹고 살았던, 구질구질한 우리 집 사정을.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려면 하루빨리 취직을 해서 나가 사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