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야 Apr 10. 2019

가난은 내 잘못이 아니잖아 #2



가난은 부끄러움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드라마 <SKY 캐슬>을 열심히 챙겨봤다. 주인공은 염정아 배우가 연기한 한서진이라는 캐릭터였다. 드라마 속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부정하고 거짓으로 꾸며낸 삶 가운데 살아왔다. 양 손 가득 선지를 끌어안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치욕스럽고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녀와 상반되는 성향을 가진 이수임(이태란 배우)은 그녀에게 무엇이 그리 부끄럽냐고 묻지만, 무엇이 부끄러운지 명확히 짚을 수 없을 만큼 어린 시절의 자신을 받아들이기 버겁다. 한서진에게 과거는 평생에 걸쳐 지우고 싶은 잘못된 기억일 뿐이다.








나는 평범한 동네에서 자랐다. 특별히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은 동네가 아니었고 달동네마냥 쓰러져가는 집들도 없었다. 하지만 자칫 평범하고 그냥저냥인 동네에도 빈부격차는 존재했다.

6살 때, 오빠가 다니는 초등학교 안에 있는 병설유치원에 다녔다. 그리고 그해 여름, 유치원에서 수영장으로 현장체험학습을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나는 같은 반 친구들과 수영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보낸 것 같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들뜬 기분으로 할머니를 향해 소리쳤다. 


"유치원에서 수영장 간데요!"


집에 들어가자마자 옷장을 뒤졌다. 나는 내 수영복을 참 좋아했다. 내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예뻤기 때문이다. 수영복을 입고 유치원에 가고 싶을 만큼 내 수영복은 예뻤다. 빨갛고 하얀 체크무늬 배경 위에 수영과 관련된 여러 물건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수영복이었다. 누가 사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옷이 참 좋았다. 

수영복을 꺼내 억지로 억지로 입어봤다. 낑낑거리고 있자 할머니가 다가와 나를 도와주셨다. 그런데 수영복이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수영복을 입고 있자니 자꾸 몸이 구겨졌다. 그새 몸이 자란 것이다. 나를 쳐다보시던 할머니는 그 수영복은 이제 못 입겠다고 하시며, 쓰레기통 쪽으로 옷을 던졌다. 그리고 오빠들 옷장 속에서 수영복을 꺼내셨다. 남자 수영복이었다. 


할머니는 단호하셨다. 나는 또 자랄 것이고 수영복을 사도 금세 몸이 커질 것이라고 한 번 입자고 수영복을 살 순 없다고. 사치라고. 아직 어려서 여자인 게 티도 나지 않는데 이거라도 입으면 되지 뭘 그렇게 따지냐고 혼을 내셨다. 나는 그 수영복이 입기 싫어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할머니의 화만 더 커질 뿐이었다.


왜 유치원에선 수영장에 간다고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유치원이 싫어졌다.  수영장엔 너무 가고 싶었지만 남자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할 순 없었다. 아픈 척 안 가려고 했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할머니는 내 꾀병을 알아보셨고 나는 또 한 번 혼이 났다. 그리고 수영장에 갔다. 




탈의실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예쁜 수영복을 입고 신난 친구들이 이리저리 뛰노는 가운데 나는 가만히 서서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평소 분홍색 옷만 입던 애는 그날도 분홍색 수영복을 입었고, 평소 남자처럼 옷을 입던 애는 무늬가 거의 없는 단색의 수영복을 입었다. 모두 어깨부터 다리까지 내려오는 여자 수영복들이었다.


'차라리 내가 남자였으면.'

'TV에 나오는 마술처럼 이 순간만 남자로 변한다면 좋겠다.'


간절한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선생님이 나를 향해 오셨다. 아마 내가 수영복을 못 입는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나를 보며 친절하게 웃으시던 선생님은 내 가방 속에서 수영복을 꺼내 드시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그런 선생님을 보고 또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선생님은 "이거 입고 놀면 되지~"라며 내게 남자 수영복을 입혀주셨다.

친구들이 내게 물었다.


"야, 니는 여자면서 왜 남자 꺼 입고 있어?"

"어? 잘못 가꼬 왔다. 헷갈려서 오빠 꺼 들고 와뿌다."


거짓말이었다. 아주 새하얀 거짓말. 친구들에게 돈이 없어 수영복을 못 샀다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 가난한 친구들은 놀림의 대상이 되었는데, 나는 놀림을 당하고 싶진 않았다. 


우리 집이 다른 친구들의 집보다 많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6살 이후로 나는 자주 나의 옷차림과 친구들의 옷차림을 비교했다. 









우리 집은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집이 어려워요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자 초등학교 때는 내지 않았던 돈들을 내야 했다. 공납금이라든지 학생회비라든지 자잘하게 드는 돈들이었다. 


가끔 종례시간 때 선생님이 A4용지 묶음을 들고 오셨다. 나는 그 종이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며칠 후가 되면 칠판에 이런 글씨가 쓰였다.


OO비 안 낸 사람(소풍비, 급식비 등)


처음에는 칠판 모퉁이 가득 이름이 적혀 있지만, 이내 조금씩 그 수가 줄어든다. 나는 칠판에 이름이 몇몇 남지 않을 때 겨우 이름을 지웠다. 절반은 집에서 가져와 낸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학교에서 지원을 받는 것이었다.  



돈을 내라는 종이를 받으면 먼저 할머니께 내밀었다. 할머니는 글자를 모른다며 전화기 옆에 종이를 접어두라고 이야기하신다. 종이를 반으로 접어 전화기 위에 올려두면 집에 온 아빠가 내용을 확인한다. 아빠는 꼭 언제까지 내면 되는지를 확인하셨다. 그리고 그 날짜가 다 돼서야 손에 돈을 쥐어주셨다. 그런데 그 날짜가 되어도 돈이 없을 때가 있다. 그러면 할머니가 내게 말하신다. 


"선생한테 가서 빌어라. 우리 집은 부모님이 이혼을 하셔서 집이 어렵다고. 이번에는 봐달라고 캐라."

"아, 왜! 돈 그것도 없나!"


내가 한 번에 수긍하지 않고 말을 받아치면 할머니는 화를 내셨다.


"집에 돈이 있으면 내가 와 이러고 살겠노. 우리가 돈이 어딨노. 먹고 죽을라캐도 없다. 니는 아가 와 그래 욕심이 많노. 학교 잘 다니는 것도 다 누구덕인데, 꼭 내 속을 뒤집어야 겠나. 나는 시대를 잘못 만나서 한글도 못 배웠고, 너거 아빠는 먹고사는 게 힘들어가 학교도 제대로 못 갔는데. 니는 학교를 다니는 것만으로 감사하다 캐야지. 니가 니 엄마 밑에서 자랐어봐라. 학교는 제대로 다닜겠나. 지끼지 말고, 내일 가가 시키는 대로 이야기해라. 안 카기만 캐봐라. 확, 죽이삔다."


'중학교까지는 의무 교육이거든! 안 시키면 아빠 잡혀가거든!"

마음속에선 쉬지 않고 할머니 말에 대들었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킨 이야기를 그대로 할 순 없었다. 하루하루 미루고 미뤘다. 할머니는 내가 집에 돌아올 때마다, 내가 자기가 시키는 대로 이야기를 했는지 확인하셨다.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고 하면 또 혼이 났다. 그래서 이야기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자주. 

결국 날짜는 다가왔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가 되면 한 발 한 발 억지로 걸음을 뗐다. 어렵게 교무실에 갔지만 교무실에 학생들이 너무 많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수업시간이 시작되고 애들이 다 교실로 간 후에 입을 뗐다. 말보다 감정이 앞서, 눈물이 났다.


바보같이 나는 다른 핑계를 대지 않고, 진짜로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이야기를 했다. 혹여나 내가 거짓말을 한 게 들통나면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쌤, 할매가 저희 집 이혼해서 형편이 안 좋다고, 이번에는 돈이 없데요."


담임선생님의 표정은 유치원 때 봤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고 있지 못했다.



나는 매해 새 학기가 되면 교무실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감사하게도 선생님들은 최대한 내가 같은 반 친구들과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매년 빼놓지 않았다. 나중에는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내 형편을 다 아시는 듯했지만, 꼭 내게 진짜로 형편이 안 좋은지를 확인하셨다. 나는 학교의 지원을 받으며 언제나 비참해졌다.




할머니는 왜 늘 이혼과 가난을 엮어 나를 설득하고 또 혼내셨을까. 당시만 해도 이혼을 입밖에 잘 내지 않았던 때였다. 이혼한 가정은 곧 문제가 있는 가정으로 평가당했다. 이혼을 하면 부모에게 상당한 문제가 있는 걸로 인식되었고, 그런 집에서 자란 아이에 대해서도 편견이 심했다. 

나는 그렇게 엄마 없는 가난한 아이로 포장되었다. 밖에서도, 내 마음 안에서도.




이전 01화 가난은 내 잘못이 아니잖아 #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