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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야 Mar 14. 2019

아빠가 낯선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2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로 1주일간은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밥 생각도 나지 않았다. 껍데기는 멀쩡했지만 속은 곯아갔다.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퇴근을 하고. 그냥 시간을 보냈다.


2주 정도가 지나자 크게 힘들지 않았다. 사는 게 바빠서 다른 생각을 하기가 힘들었다. 평소에도 부모님과 자주 연락을 하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점점 괜찮아졌다. 1달이 흘렀을 땐 잊어버리고 지냈다. 한편으로는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모가 나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둘이서 싸우다가 혹여 이혼이라도 하면 아빠가 나를 귀찮게 하지 않을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부모가 없어도 잘 사는 사람이 있으니까 나도 그렇게 나 혼자만 잘 살면 되겠다 싶었다.






12월이 되었다. 겨울이 다가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매일 아침 현관문을 나서면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매일 조금씩 내 몸은 더 작아졌다. 그 해 초겨울은 유난히 추웠던 것 같다.

그즈음 서울에서의 삶이 현실로 다가왔다. 회사에 적응을 했고 새로 이사한 집에서의 일상도 익숙해졌다. 자주 나를 찾아왔던 절망이나 서울에 산다는 우월감도 제자리를 찾은 듯 더 이상 불쑥불쑥 튀어나오진 않았다. 정신이 평이한 상태였다. 감정 모두가 머릿속에서 나와 제 일을 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면서 나는 푸석푸석해졌다. 그리고 외로웠다. 전에는 느끼지 않았던 깊은 외로움이 나를 감쌌다. 아무리 숨을 크게 쉬어도 명치께 있는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한동안 그 답답함과 함께 지냈다. 어느 날 답답함이 내 상태를 말해주었다. 가슴속에 무엇이 꽉 막힌 게 아니라 따뜻함이 들어와야 할 자리가 비어있어 마음이 추운 거라고. 얼어붙은 거라고.


나는 가난했다. 아무리 돈을 벌어도 돈을 모이지 않았다. 당장 살 곳은 없는데 보증금이 없어 자취를 하는 친구 집에 들어갔다. 4평 남짓한 작은 방이었다. 친구는 내게 ‘니 덕분에 방세도 아끼고 좋다’고 말했지만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한 달이 지나면 26살, 20대 중반의 끝에 서는데 나는 20살 때보다 더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른으로, 내가 내 인생을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건 그 무엇보다 버거운 일이었다. 그때 문득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는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서울에 올라와 살았고 한 여자의 남편,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그의 나이 고작 23살 때.






아빠는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다. 너무 힘들었고 부끄러운 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주변 사람들과 그가 나눈 이야기를 통해 그가 살아온 과정을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20살에 가까운 어느 때에 서울로 올라왔다. 부모에게선 십 원짜리 하나 받지 못했다. 돈이나 지지는커녕 그는 십여 년 가까이 가족을 부양해왔고, 이제는 자신의 삶을 살겠노라고 시골을 도망치듯 떠나 서울로 왔다.

할아버지는 6.25 참전 군인이었다. 무사히 살아온 것을 복이라고 여긴다면서 국가유공자 등록을 거부했다. 그 덕분에 가족들은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할아버지의 몸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핑계로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면 밥상을 엎었다. 그 옆엔 17 혹은 18의 나이에 시집을 와 아들 둘과 딸 셋을 낳은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화를 내는 남편이 무섭고 싫어서 눈치만 보고 살았다. 아빠는 둘째였다. 아들이라 예쁨을 받았지만 아들이라 돈을 벌어야 했다. 형은 첫째인 데다 몸이 썩 튼튼하지 못해서 동생인 아빠가 남에 집에서 일을 했다. 그 때문에 초등학교를 겨우 다녔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다고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도저히 더는 못 살겠다 하고 서울에 온 것이다. 서울에만 가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가족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아빠 역시 서울에서 힘든 삶을 살았다. 아니, 내가 살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한 일상이었다. 집세가 비싸 멀리 살았지만 돈은 모이지 않았다. 지치고 외로울 때 만난 아가씨가 문득 ‘임신’을 고백했다. 눈이 아득해졌을 것이다.

물론 좋은 날도 있었을 터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한 시간,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술 한잔 하던 시간. 하지만 그보다 일상의 무게가 더했으리라 짐작한다. 평생 누군가를 먹여 살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몸서리 쳐졌을 터다. 그때 그의 나이가 25살은 되었을까.






그때 내가 살던 곳은 청파동이었다. 4호선 숙대입구 역에서 굴다리를 지나 집으로 가는데, 그 굴다리 옆엔 취한 사람들이 서성인다. 몇몇은 담배를 피우고 토하고 비틀거린다.

멀리 비틀거리며 겨우 걸음을 떼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내 아빠가 보였다. 아빠도 이런 낡고 오래된 서울의 길을 수없이 오가고, 취하고, 토하고, 울고, 비틀거렸을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설고 가여운, 젊지만 가난한 남자의 뒷모습에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의 아빠도 저 사람들처럼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불쌍한 남자였겠지.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부모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이 며칠간 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갑자기 연락이 하고 싶어 졌다.

“당신도 참 힘들게 살았군요”, “이 크고 외로운 도시에서 1년을 살아보고서야 당신의 힘듦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겠어요”, “내 나이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무거운 짐을 지어야 했던 당신을 응원하고 싶어요”, “당신이 지금 이룬 삶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이제야 당신이 멋져 보입니다.”

편지를 썼다. 아빠가 나를 용서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이제야 내 잘못을 깨달았고, 그 말을 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가 가족과의 연을 끊겠다고 그 행패를 부린 지 3달이 지났을 무렵, 처음으로 건넨 안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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