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보내고도 몇 달이 지나서야 전화를 걸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전화를 한다는 것과 통화를 나눈다는 것에 온 신경이 쓰였던 듯하다. 다행히 아빠는 내 전화를 받았고 우린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밥은 잘 먹고 다니냐?’ ‘아픈 데는 없냐?’ 등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전화를 끊고 하루 이틀 후, 이번에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와 통화하기 전에도 엄마와는 이따금 전화를 했었다. 그 전까진 서로의 안부를 묻는 데 그쳤었는데, 아빠와 전화를 하고 나서는 이야깃거리가 한 가지 추가되었다.
“집에 한 번 안 오나?”
“가야지, 근데 조금만 더 있다가.”
아빠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여전히 없었다.
그 후로도 엄마는 내게 전화를 걸어 대구에 언제 내려오냐고 물었다. 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아빠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의미한다. 설령 내가 보고 싶지는 않더라도 언제까지 이렇게 남남처럼 살 수는 없으니 얼굴을 보자는 뜻이다.
몇 번의 거절과 몇 달간의 미룸 끝에, 딱 1년 만에 다시 집에 갔다. 추석이었다. 명절을 맞아 작은 오빠와 새언니, 두 명의 조카까지 내려온 덕분에 집이 시끌시끌했다. 무사히 첫 대면을 마쳤다. 아빠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타지에 사는 나를 안타깝게 생각하기로 하신 듯했다. 술 취한 아빠는 나를 꼭 안았고 나는 모른 척 품에 안겼다.
우리 사이는 전보다 훨씬 가까워졌다. 같이 살 때는 함께 마시지 않던 술도 함께 마셨고 전에는 하지 않던 이야기도 나눴다. 아빠는 자기의 옛날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데, 그래도 내가 묻는 말엔 하나씩 답을 해줬다.
그리고 그다음 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빠는 울었다. 남이 볼 때도 남이 보지 않을 때도. 할머니의 죽음은 나에게도 아빠에게도 큰 충격으로 남았다. 괜찮은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마음속 공백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한편으로는 편해졌다. 아빠와 나에게 할머니는, 평생에 걸쳐 값을 빚이 있는 사람이었다. 더 잘해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만큼 어깨에 메고 있던 짐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사람이란 게 그렇게 이기적이고 못됐구나, 스스로를 비난해봐도 어쩔 수 없었다. 나만큼 아빠도 편해 보였다.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계셨던 그 몇 주 간, 밤마다 병원으로 달려갔던 그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역시 나만큼 부모를 원망하고 사랑했을 것이다. 할머니를 산에 묻고 돌아오던 밤 그는 비로소 편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밤, 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자정 무렵에 걸려온 전화에 기분이 꺼림칙했다. 아빠가 가톨릭대학병원 응급실에 있다고 했다. 의사가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단다. 평소 앓고 있던 천식이 알레르기로 악화되어 호흡이 힘든 상황이며, 약물을 주입했지만 효과가 없다고. 불과 두어 달 만에 천식으로 두 명이 떠나간다고 생각하니, 정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늦은 밤이라 막차까지 끊긴 상황. 우선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 밤 눈물이 흐르다 모두 말라버렸다.
아침 7시 무렵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거짓말처럼 아빠가 다시 숨을 쉬고 있고 의식도 돌아왔다고. 오후 반차를 쓰고 대구로 내려갔다. 핼쑥해진 아빠의 목에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링거 바늘 옆에 살짝 묻어있는 핏방울로 지난밤의 상황이 느껴졌다. 엄마도 지치고 두려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대로 아빠를 보내면 정말 내가 안될 것 같았다.
며칠 후 아빠는 건강한 몸으로 퇴원을 했고,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던 개인택시를 팔았다. 도로 위에서 여러 위험을 목격하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가 버겁다고 했다. 나는 그런 아빠를 응원했다.
1년이 지난 2016년 봄. 아빠가 환갑을 맞았다. 오빠들과 함께 모은 돈으로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아빠와 엄마, 큰 오빠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제주도로 떠났다. 대구공항에서 탑승시간을 기다리던 그때 아빠는 공항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늘 손님을 내려주고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돌아갔던 수많은 날들과 달리, 이날 그는 처음으로 대구공항에 비행기를 타러 왔다. 생애 최초의 비행기였다.
제주도에서의 첫날밤, 공항 근처 펜션에서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웠다. 아빠 한 잔 나 한 잔, 소주를 채웠고 오빠와 엄마는 콜라로 건배를 했다. 나와 오빠가 제주도에 대해 떠드는 사이 아빠의 눈가가 떨려왔다.
“아빠는 아빠로서 너희들한테 하나도 해준 게 없는데, 너희들은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노. 미안타, 아빠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 없는 남자, 부모와 멀리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는 남자, 가족들과 펜션에 놀러 온 적이 없는 남자. 화목한 가정을 꾸려본 적이 없던 남자. 나보다 더 불쌍하고 여린 남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빠의 모습, 비로소 마주한 아주 낯선 모습의 한 남자가 울고 있었다.
3박 4일 내내 아이처럼 제주를 구경하던 그 남자와 그의 아내, 나의 엄마. 그 두 사람의 모습은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아빠가 가족들에게 보였던 그간의 모습은, 그가 한 번도 가족들로부터 사랑을 표현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아빠와 내 할머니는 ‘전쟁’ 전후에 태어났고, 그저 자신들의 몸이 성한 것만으로 부모가 있는 것만으로 행복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가족 간의 희생은 당연했다. 그래서 나의 아빠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해야 했다. ‘잘했다’는 수고의 말이나 ‘힘들지?’라는 위로의 말보다 ‘그래도 해야지’라는 재촉과 요구의 말이 그를 짓눌렀을지도 모른다.
그 시대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시대를 살아왔던 그들이 안타깝다. 사회에 나와 온갖 무시와 경멸을 당했을 그가 불쌍해졌다. 비로소 그의 삶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나는 여전히 아빠를 이해할 수 없다. 지금도 의견이 다르고, 전화도 자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진심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서로가 소통하는 법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언제나 지금처럼, 꼭 지금처럼 행복한 기억으로 우리의 관계가 마무리되길. 언제나 바라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리라 애쓰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