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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초 Feb 12. 2019

무섭지만 끓여보는 날

20190212 

"나중에 아이들하고 잘 놀아주고, 먹고 싶다는 것도 다 만들어 주는 아빠가 될 거야."

"어른 돼서 나는 회사 안 다니고 집에서 살림할 거야. 그래야 내 아이랑 놀 수 있어. "

"아이는 두세 명쯤 낳을 거야."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녀석이 어떤 아빠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아주 구체적이다.

심지어 나중에 생길지 안 생길지도 모르는 미래의 딸아이 머리를 묶어 주겠다며 내 머리카락으로 연습을 한 적도 있다. 


오늘은 내일이 생일인 아빠를 위해 직접 미역국을 끓이겠다고 나섰다.

"아빠, 고기 좋아하니까 소고기 넣어야겠지? 양지로 사다 줘."

"미역국을 좋아하니까 양지든 굴이든 조개든 다 좋아할 걸?"

"그래? 그럼 조갯살로 해볼게. 대신 간은 엄마가 봐줘. 나 미역국 못 먹잖아." 


4살 이후로 미역국 냄새도 맡지 않고, 내가 미역을 먹는 것만 봐도 찌푸리는 아이가, 초등학교 때 급식에서 피해야 할 식품에 당당하게 미역에 체크해 간 아이가 생일인 아빠를 위해 미역국을 끓이겠다니. ^^  


"근데 왜 양지가 없어?"

"조갯살로 한대서 안 샀지."

"양지랑 조갯살 같이 한댔지. 양지로 꼭 해보고 싶었다고~~~" 


도대체 왜 꼭 양지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끓여야 하니까, 

"그랬어? 내가 잘못 들었나 보네. 지금 네가 가서 사 올래? 아님 그냥 하시든지^^" 

다행히 조갯살만 넣고 끓이기로 하고 조갯살을 씻고 멸치육수를 끓였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미역이 무섭다고 난리다.

"미역, 살아있는 거 아니다? 뭐가 무서워?"

"어쨌든 무서워. 이것만 엄마가 씻어줘." 


4살 때 어린이집 선생님이 억지로 미역국을 입에 넣었는데 그때의 냄새가 너무 싫었다고 해명한다. 밥을 남기지 않고 다 먹는 것도 좋고, 골고루 먹는 것도 좋지만 방법이 우격다짐이면 아이는 충분히 폭력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억지로 먹었던 음식이 내게 어떤 기억으로 남았는지를 떠올려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미역이 무섭다는 말엔 미역국을 억지로 먹이던 선생님에 대한 무서운 기억도 함께 들어있는 것 같다. 


 "엄마 간도 좀 봐줘. 나 못 먹잖아."

"으이그~~~" 


우여곡절 끝에 끓인 무서운 미역국이 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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