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치앙마이
제주도 여행 중이고 마지막 날이다.
원래는 곧 바빠질 시기가 오기 전 짧게 다녀오는 휴가 개념이었다. 하지만 바로 저번주에 팀장님을 들이받고(?) 팀 이동을 요청했기에 그 의미가 달라져버렸다.
회사에서는 내 요청은 받아줬지만 보직 변경 전까지 무급 병가를 요구했기에(*본인들은 권유였단다) 다음 주부터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병가를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 하던 업무를 넘기고 갔는데 나름 난리가 나버려서 휴가 내내 회사의 연락을 받아야 했다. 쉬워 보였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단다. 내가 맡았던 일을 저따위로 처리하는 걸 보고 화가 부글부글 났지만 한동안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회사에 입사한 지 어언 6개월. 야근한 시간만 따져도 족히 풀타임 근무로 한 달은 될 것이다. 최장시간 15시간씩 회사에 머물며 일했다. 독감에 걸려서 오한에 벌벌 떨면서도 새벽 1시에 퇴근했다. 그렇게 업무를 처리해 줘도 돌아오는 말은 '왜 이렇게 업무에 집착하냐, 너 때문에 다른 팀원들이 눈치 본다'와 같은 말이었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지금은 반드시 쉬어야 한다.
하지만 예상했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일에 의지해 불안 증상을 이겨내고 있던 나에게 일이 사라지니 그것 또한 불안이었다.
더군다나 2박을 머무는데 신경안정제를 하루치만 챙겨 왔단 말이지? 오늘 오전은 어젯밤에 약을 먹지 않아서인가 심장이 두근거리고 불안함이 몰려와서 버스를 타고 가는데도 식은땀을 흘렸다.
버스에서 내려서 좀 걸으니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한동안은 일도 없이 쉬어야 하는데 난 무엇을 하면서 이 불안함을 견뎌내야 할까?
최근에는 불안감이 부쩍 올라와서 거의 한 시도 쉬지 않고 뭔가를 깨작깨작 먹고 있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다. 원래는 하루에 14시간 정도는 공복을 유지하는 루틴을 지킬 수 있었다. 작년에 치앙마이 생활을 끝내고 돌아와서 일을 시작하고, 일 스트레스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먹을 것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얼마 전 정신과 진료에서 이 증상에 대해 말하니 선생님은 약의 용량을 높여 처방해 주었다.
치앙마이에서 혼자 있을 때는 약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으니 운동하고, 계속 돌아다니고, 글을 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온몸으로 불안을 받아냈다. 2~3주를 내내 울면서 지낸 적도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약과 상담의 도움을 받아도 결국 여전히 불안하다. 이제는 뭘 해야 하나?
한편으로는 어차피 경험할 일을 조금 당겨서 경험하게 된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일을 영원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았는가.
여행 첫째 날에는 3만 보, 둘째 날에는 2만보를 걸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한라산 정상은 찍지 못했지만 한 시간 정도를 걸어 올라 어승생악이라는 곳에도 다녀왔다. 일시적이지만 그렇게 걸으니 조금은 불안을 견뎌낼 수 있었다.
역시 움직이는 것 말고는 방법은 없는 건가, 그런 생각 중이다.
먹고, 운동하고, 글 쓰고, 움직이다 보면 그래도 어떻게든 이 불안을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아까 버스를 타고 오면서 이렇게 불안할바에야 죽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 회사 스트레스가 심해져서 상담을 받을 때 상담 선생님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라고 말해주었다.
불안이 올라올 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뭐라도 하는 것은 정말 잘하고 있는 일이다.
그 누가 나에게 헛소리를 지껄여도 나는 잘하고 있다.
카페에 조금 더 머물며 책이라도 읽을까 했지만 다시 일어나서 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