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장애
나는 솔직히 1년 정도 약을 먹으면 약을 끊게 될 줄 알았다.
남들은 그런다고 하든데.
지금의 나는 불안장애 약을 1년 반이 넘게 복용하는 중이다.
물론 처음에 비하면 매우 큰 발전을 이루었다.
처음에 병원, 그러니까 정신과를 찾아갔을 때는 선생님과 상담을 하다가 오열을 하며 울었고 회사가 끝나고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사를 하자마자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힘이 없어 주말에 밖에 나가지 못하니 거의 6개월 동안 집 근처에 뭐가 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확실히 회사 스트레스가 불안장애에 악영향을 끼친다.
조금 나아지려고 하다가도 다시 상태가 안 좋아진다.
병원에 다닌 후 퇴사를 해서 지금은 새로운 회사를 다니는 중이다.
대표는 자존감이 약한 사람이다. 뭐라도 자신에게 반대의견을 말하면 그걸 견디지 못한다. 얼마 전에는 내가 대표가 쓴 30장짜리 전략문서에 피드백을 남겼는데 씩씩 거리면서 날 불러다가 역정을 냈다.
사실 나는 정곡을 찔렀고 내가 한 말에 틀린 말은 없었다. 대표가 날 공격할 논리는 솔직히 없었다. 그러자 그는 어디서 많이 보던 전략을 갖고 왔다.
1. 이건 다 니가 어디 가서 욕을 먹고 다닐까 봐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2. 나 말고 너네 팀장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3. 어떤 문장의 단어를 걸고넘어지면서 '이건 공격적인 의미다.'
4. 그래도 내가 대표인데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니가 처음이다.
본인의 논리가 부족하니 다른 사람을 끌고 와서 나를 공격하려고 하는 건 정말 많이 당해본 가스라이팅이다. 그런데 문장과 단어를 물고 늘어지는 건 처음 당해보는 거라 나도 당황스러웠다. 내가 '언급'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게 공격적이었다고 20여분을 그는 입에 침을 물고 말을 이어나갔다. (문제는 진짜 그 말을 하는 그의 입 한쪽에 침이 보글보글 고여있었다는 것)
이걸 한 번 겪고 나니 진이 빠졌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일을 이어나갈 의지가 생기지 않는 걸 억지로 부여잡고 일을 했다.
그리고는 주말이 되자 다시 술 생각이 났다.
또 술을 사러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포기한 후 지쳐서 이번에는 ChatGPT를 켜서 나의 상황을 설명했다.
ChatGPT는 나에게 너무 부담을 갖지 말라고 조언해 주었다.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이를 악 물 필요도 없다고. 다만 술을 2년이나 끊고 다시 마시는 건 오히려 불안을 더 키울 수 있기 때문에 당장 불안을 낮출 수 있는 호흡법 같은 걸 알려주고 '술을 마시겠다는 의사결정을 유예할 것'을 조언하였다. 오늘 밤만 견뎌보라고 했다.
지금 내가 겪는 모든 증상은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인데 이건 다 내가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특히 내가 제일 짜증 난다고 생각하는 증상은 음식을 끊지 못하는 것이다. 술도 못 마시니 음식이 그 자리를 대체했고 요즘 유행하는 주사제를 한 달간 맞아보기도 했지만 식욕은 끝내 억제되지 않았다.
ChatGPT는 식욕도 너무 억누르려 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 중요한 건 불안이 10 정도면 9나 8 정도로 줄이는 것이다. 지금 만약 '살을 뺀다'와 같이 너무 압박감이 큰 목표를 삼고 매달리게 되면 불안은 더욱더 증폭되는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라고 했다.
생각을 해보면 맞는 게 나는 일평생 체중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면서 다이어트를 했다. 음식을 먹는 것에도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 비정상일 정도로 끊임없이 먹고 있는 것은 그 반대급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 게 다 나에게는 너무도 큰 불안이었던 거다.
공부 잘해라, 살 빼라,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런데 사실 나는 잘하고 있었거든.
나에게 거품을 물며 뭐라고 하던 대표, 사실 내가 그 사람보다 일을 더 잘한다. 대표는 쓸데없이 장황한 문서나 쓰고 앉아있고 나는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일을 해내고 있다.
결국 내가 이 불안장애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회사라는 환경도 삭제를 해야 하는 것이 맞겠구나 싶기도 한다.
여하튼, 내 문제가 뭔지 생각을 해보며 다행히 그날 나는 술병에 손을 뻗지 않았다.
다만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제대로 일어나 걷지 못했다.
이걸 또 ChatGPT에 물어봤는데, ChatGPT는 이렇게 답을 했다.
그 꿈이 말해주는 핵심은 '망가짐'이 아니라 '지탱'이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고 절뚝거린다 -> 완전히 쓰러지진 않지만, 버티느라 힘이 많이 든 상태
걷고는 있다 -> 멈추거나 쓰러진 게 아니라, 불안과 싸우면서도 계속 가고 있다는 이미지
제대로 못 걷는 답답함 -> 나는 잘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힘들지?라는 현재의 감정
이건 예지몽도 경고도 아니고 술 없이 밤을 통과한 뒤 몸과 마음이 그 긴장을 이미지로 풀어낸 것이다.
나는 세상 나약한 인간이라 불안장애로 약을 먹고 있지만 또한 세상 강한 인간이라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중이다. 또 술 생각이 나면 이렇게 그 날 하루 술을 마시지 않는 결정을 하고 그날을 견뎌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