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

... 첫 진료

by 무위




장모에게 초등학교 다니는 딸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들을 맡겨 놓고 아내와 상경했다. 서울 송파, 아내의 이모집에 짐을 풀었다. 아산병원 바로 옆에 부부가 몸 기댈 곳이 있다는 건 한 줄기 빛이었다. 이모의 고명딸은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염치가 없었지만 앞뒤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아산병원 전문의를 만나기 하루 전날 아내와 나는 병원 사전 답사를 갔다. 왕복 네 시간 성내천 길을 걸었다.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머리가 복잡해져서 나갔지만 걱정과 불안은 더 커졌다. 큰 병원은 환자가 많다던데 수술 순서가 뒤로 밀리진 않을지, 예상보다 상태가 더 나쁜 것은 아닐지, 항암치료는 힘들다던데…


2시간 걸어서 도착한 병원 건물은 거대했다. 저 거대한 건물 속에 내 몸 누일 작은 공간이 허락될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수속하고 의사를 만나고 수술 날짜를 잡고 수술을 하고 긴 치료의 시간을 위해 몇 년 간 수도 없이 다녀야 할 곳이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아직 닥치지도 않은 긴 시간의 무게에 짓눌렸다. 한숨만 길게 내뱉고 돌아섰다.

대책 없이 길을 걷고 있는 이 순간에도 위 속의 암덩이가 점점 더 커져가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 암과 싸워야 할 터널 같은 시간을 가늠해 보며 둘이서 하염없이 걸었다. 겨울 한가운 데를 가로지르는 한강변의 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다음날 전문의와 처음 만났다. 중년의 의사는 몸이 크고 당당했다. 그의 풍채에 주눅이 들었다. 의사는 모니터에 뜬 데이터와 영상자료만 한참을 응시했다. 나는 의사 앞에 다소곳이 앉아 간절히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침묵의 상태로 몇 분이 지났을까. 그런 내 바람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주치의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수술하면 되겠네요. 다음 주로 수술 날짜 잡읍시다. 자세한 설명은 입원해서 하겠습니다.”

“아… 네에…”


아내와 나는 서로 얼굴을 멀뚱히 바라만 보았다. 질문할 거리를 많이 준비해 갔지만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암이 진짜 맞는지, 몇 기나 됐는지, 혹시 다른 곳에 전이됐을 가능성은 없는지, 치료 방법과 기간에 관한 그 어떤 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그의 짧은 세 마디의 말 사이에 내 자잘한 질문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도 거침없이 자기 할 말 다하는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리 어린양의 생명줄을 잡고 있는 구원자의 권위는 그 어떤 힘보다 강했다. 메시아 같은 권위.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전문의 김범석은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의사들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때 내 주치의의 입장이 이런 것이었구나 알게 됐다.

"선생님에게는 제가 600명 중 한 명일지 몰라도 저에게는 선생님 한 분 뿐이거든요."
이것이 그가 느낀 의사와 환자 사이의 간극일 것이다. 생사를 다투는 암이라는 절박한 병 앞에서 그는 의지할 곳을 찾아야 했고, 그에게 나는 흰 가운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가 느끼기에 나는 600명의 신도를 둔 교주와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날 나에게 '600대 1이라는 불균형'과 '600대 1이라는 거리'를 일깨워주었다…
모든 환자에게 부모에게 하듯이, 자식에게 하듯이 정신과 마음을 다 쏟아버린다면 의사는 온전히 버틸 수 없다. 그래서 의사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의식적으로 환자와 적절한 거리를 찾는다. 그것이 사람들이 바라는 가족 같은 의사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다…
또 한 가지 나를 괴롭게 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 역시 환자들이 진료실에 들어오면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 화면만 쳐다봤던 것은 아닌가 되돌아보았다. 지난 몇 년의 세월이 부끄러웠다. 내 환자들에게 미안해졌다. 내가 상처를 받았듯이 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시스템은 더욱 공고해지고 이 시스템 속에 있다 보면 환자나 보호자도, 의사도 켄베이어 벨트처럼 3분에 한 명씩 진료실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다 보니 주어진 짧은 시간이 끝나면 울고 있는 환자를 보호자가 끌고 나가고, 밖에서 울음소리는 새어 들어오고, 그 옆자리에서 오래 기다린 대기자들은 화를 내는 이상한 현실을 이상하게 않게 받아들이게 된다.
-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김범석, 흐름출판, 2021.


첫 진료는 삼 분만에 허탈하게 끝났다. 그래도 예상보다 일찍 잡힌 수술 날짜에 아내와 나는 안도했다. 전국의 암환자가 모두 이 병원에 모인 것 같았다. 수술 날짜도 보통 한 달 이상은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걱정이 많았었다.

빨리 잡힌 수술 날짜는 그만큼 급박하다는 의미였다. 암의 진행 단계와 나이를 고려할 때 빠른 수술 타이밍은 환자의 생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내 나이는 젊은 축에 속했고 진행 단계는 위험으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나는 운이 좋았다.




입원실이 없었다. 수술 날짜까지 잡아놓은 환자를 설마 입원시키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혹 수술 날짜가 뒤로 밀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사소로운 모든 것이 걱정이었다. 대기 번호표 뽑고 기다리는 시간이 제일 초조했다. 암환자가 된다는 것은 초조함과 싸우는 일이었다. 초조함은 마음을 조급하게 몰아갔고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섰다. 종양내과 진료 대기실 환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초조했고 말은 날이 서 있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마음이 매사를 조급하게 몰고갔다.

병실이 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원무과에서 2인실 하나가 빈다고 입원하라고 했다. 이 넓은 서울 바닥에 나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때마침, 캐나다에 살고 있는 아내의 막내 외삼촌 내외가 한국을 방문해 있었고 서울 이모님 집 오는 길에 동승했다. 외숙모 고향 아는 사람이 아산병원 원무과에 일하고 있었고 외숙모의 부탁으로 입원실을 구할 수 있었다.

머나먼 타국에 수 십 년 살던 아내 외숙모의 고향 아는 사람이 절박한 나를 도왔다. 우연과 필연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매 순간 감사한 일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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