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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Nov 29. 2023

다소 심심甚深한 나의 글쓰기





문법의 단위에서 언어는 음운(자음과 모음), 음절, 형태소, 단어(품사), 어절(문장성분), 구와 절, 문법기능(종결, 높임, 시제)으로 점점 확장되어 나아간다.

텍스트(글) 차원에서 언어는 단어, 아포리즘(잠언), 단상, 일기, 에세이, 소설로 점차 발전되면서 쓰게 된다. 다만, 이들의 관계는 순서라기보다 혼합된 '쓰기'의 형태로 표현된다. 이것들 모두가 글이다. 글은 의미(생각)체이다. 각각의 요소는 큰 덩어리의 부분이되기도 하고, 부분들은 조립되는 부품이자 독립된 완결품이다. 이것은 전문가의 이론이 아니고 내 글쓰기의 경험적 생각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쓴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단어

수전손택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작가로서 '단어 목록'이 있긴 하다. 쓰면 쓸수록 쓰는 어휘가 부족함을 느낀다. 어휘의 고갈은 작가에게 치명적이다. 특이하거나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의미(생각)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정확한 단어를 선택하는 게 작가의 중요한 자질이다. 단어 선택을 정확하게 하면 작가 내면의 뿌연 안개 같은 추상계가 맑게 갠다.


좋은 작가는 남들이 하지 않는 '단어 목록 작성' 같은 귀찮은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빈약한 나의 '단어 목록'을 다시 풍요롭게 정비해야겠다. 생각은 대개 단어(여기서는 '키워드:핵심단어'가 더 정확하겠다)에서 출발할 때가 많다. 하루 종일이나 특정 기간 동안 단어 하나를 두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지루할 것 같지만 집중력과 지구력을 높이고 재미도 있다.    




아포리즘(잠언)

롤랑 바르트는 "날카로움은 절삭된 것의 특징이다. 말이 침묵으로 바뀌면서 정적과 갈채를 기대하는 그 허술한 장식의 순간이 오기 전에 생각을 자르는 것이, 날카로운 글의 특징이다."고 말했다.


아포리즘은 버리고 버린 후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문장이다. 불필요한 생각의 장식을 날카롭게 절삭하고 남은 하나의 문장. 유명한 작가나 명성 있는 사람만이 아포리즘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아포리즘은 생각의 노력을 끈질기게 한 사람이 얻게 되는 언어의 마지막 정수이다. 작가라면 자신의 잠언집 하나는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내게도 잠언집이 있다. 작가가 되려는 자들이여, 자기만의 아포리즘을 만들자.


애초에 아포리즘이 있어 글을 쓰기도 하고, 글을 쓰고 나면 아포리즘이 남기도 한다. 보석같은 아포리즘은 작가들의 문장에서 문장으로 전해지면서 많은 작품에 영감을 주기도 한다. 이때, 아포리즘은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다. 원석인 아포리즘은 영원불변한다.




단상

단상은 짧은 생각들의 '편린(비늘 조각)'이다. 브라이언 딜런은 <에세이즘>에서, "'편린'이라는 말은 '쇄설'과 '쇄설 퇴적암', 지질학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나는 에세이가 모종의 퇴적물이라는 발상이 마음에 든다. 에세이란 다양한 소재가 퇴적된 글, 또는 같거나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다양한 방식이 퇴적된 글이라는 발상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는 '단상들을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나는 주제를 정하고 작정하고 앉아서 글을 쓰지 않는다. 떠오르는 생각을 집중력 있게 물고 늘어진 다음 그때그때 단상으로 기록해 놓는다. 쓰고 싶은 주제가 있을 때 비슷한 단상들을 불러내서 글쓰기를 시작한다.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은 가끔씩 뚝뚝 끊기는 생각의 흐름들이 있다고 한다. 맞다. 그럴 수밖에 없다. 매끄럽게 순차적으로 구성을 계획하여 쓰는 글이 아니라서 그렇다. 투박한 생각의 조각들을 헐겁게 직조한 글이 나의 에세이다. 나는 이런 글쓰기 방식을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일방통행로>를 읽고 배웠다. 아, 이렇게 글을 쓸 수도 있구나하고.


하나의 단상에는 생각이 고도로 집중되어 있다. 이 집중된 힘이 독자를 끌어들이고, 이것들이 느슨하게 배열되어 있어서 새로움과 환기를 선물한다. 부분적으로는 '긴장'이지만, 부분들 간에는 '이완'되는 매력적인 글쓰기 방식이다.  




일기

매일 쓰는 기록. 매일 쓰는 사람이 작가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진짜 작가는 모두 일기를 쓴다. 사람들은 일기를 하찮게 여긴다. 하루의 일상, 감상의 쓰레기, 생각의 편린들이라는 '개인성'은 타인을 향한 글쓰기에서 무시당할 것라고 생각한다.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하면서 공격을 받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글은 개인의 생각에서 출발한다. 개인의 생각에서 출발하지 않은 글은 필사, 인용, 편집일 뿐이다. 자기 생각의 뿌리가 취약한 사람이 많이 취하는 편한 글쓰기 방법이다. 우리들이 일기를 하찮게 여기거나(자기 생각을 하찮게 여기는 것) 쓰기 싫어하는 것은 초등학교 때 학교가 잘못 가르친 탓이다. (교사로서 스스로도 늘 반성한다. 각자 경험해서 잘 알고 있을 테니,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      


브라이런 디런은 <에세이즘>에서 수전 손택의 일기를 "그녀가 품었던 염원들의 목록, 잠재적 모습을 미리 시험해보는 곳이자 손택이라는 성공적 존재를 구성하게 될 요소들을 해부해 보는 곳, 그녀가 발표하길 원했던 에세이 부류의 관념적이면서 가공되지 않은 버전들이 담겨 있는 곳"이라고 했다. 내가 쓰는 에세이의 재료와 단상들의 시험 버전이 일기인 셈이니, 손택의 일기는 내 일기쓰기와 유사한 점이 있다.


나는 수전 손택의 일기를 좋아한다. 손택 글의 힘은 자신의 일기에서 단련된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손택 또한 "일기에서 나는, 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한다."고 말할 만큼 자신의 일기의 가치와 의미를 높게 부여하고 있다.일 년에 단 한 권, 제본한 내 '일기책'을 지인들에게 보여 주기 시작하면서 나는 어떤 글이든지 용감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에세이와 소설

지금 내 글쓰기는 에세이와 소설 사이 어디 쯤에 닿아 있다. 둘 다 서사(스토리)를 기반으로 출발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에세이와 소설은 엄연히 다른 장르의 글이다. 논픽션과 픽션이라는 본질적 차이 뿐만 아니라 서술의 방식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에세이가 '직접적 말하기'에 중점을 둔다면 소설은 '간접적 보여주기'에 더 무게가 있다.


나는 아직 소설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에세이가 점점 소설쓰기화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말하려는 진실에 가닿으려는 노력에 에세이가 제한(또는 한계?)이 있음을 절감하고 있다. 에세이와 소설 사이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헤매고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에세이와 소설을 '실제'와 '허구'의 차이라고 간명하게 가르치고 배운 우리들의 문학 수업이 얼마나 엉터리였나를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내 글을 쓴다'는 입장에서 접근해본 적이 없어서 두 장르의 본질적 차이를 고민해 볼 기회가 없었다. 진짜로 내가 쓰고 싶은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쓰기 위해서 어떤 도구를 사용해야 할까를 놓고 갈팡질팡하는 중이다. 하지만 다 괜찮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쓰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니까. 구체적인 방법과 선택은 자연스럽게 귀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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