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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도르 Aug 14. 2020

어차피 나는 팥빙수를 먹을 거니까

마음이 조급해질 때 외우는 주문

팥이 다 익으면 나는 이 빙수를 먹을것이다

성격이 급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엄마는 밥을 먹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아빠는 이제 일어난 나에게 준비는 다 됐냐고 하기를 다반사. 일요일엔 늦잠을 자는 걸 알면서 그렇게 새벽마다 운동을 가자고 깨우신다. 하루를 빨리 시작해야 한다면서. 마지막 밥숟가락을 입에 넣기 무섭게 밥상은 이미 저녁을 먹기 전의 상태로 리셋되어 있다. 그렇게 살기를 십수 년, 이제는 나도 전투적으로 밥을 먹는다. 이유는 없다. 그냥 옆에서 누군가 빨리 먹기 때문이다.


이렇게 급한 집안에서 태어나 조급해하지 않고 느긋하게 살아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 않아도 조급한 인생, 나이를 먹으며 더욱 조급해진다. 좋아하는 일에는 그럭저럭 몰입하곤 했는데, 이제 여간해선 책 한 페이지는커녕 한 줄도 몰입해서 읽기가 힘들다. 더 깊은 어른이 된다는 건 책 한 줄 읽을 마음의 여유조차 없어진다는 말일까. 단어와 단어의 띄어쓰기 사이에 열 마디의 생각이 끼어들어 글 한 문장을 읽는 게 몇 페이지를 읽는 것처럼 더뎌지는 날이 많아 이내 책을 덮는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나였는데 행동할 용기가 까마득해지는 날도 오다니, 마흔에 비로소 나이를 실감한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현재의 문장을 오롯이 흡수하던 그 깨끗한 마음 시절에 책을 많이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한 살 더 먹는다는 게 두렵지 않고 지금 처한 상황이 내가 걱정할 모든 것이었던 그 시절에 좋은 글들을 많이 읽었더라면 나는 조금 다른 인생을 살았을지 궁금해진다.


조급해하지 말자고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곧 다가올 마흔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철이 없었던 탓인지, 현실적이지 못한 탓인지 이십 대에 그려보는 미래는 약간의 두근거림과 기대로 가득했었다. 하지만 지금 나의 미래를 그리려면 흰 종이 위에서 펜을 쥐고 몇 시간째 종이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게 된다. 건강도 직장도 나의 연애도 이제는 그 무엇에도 선 하나 쉽사리 그을 수 없는 어른이 된 것이다.


돈에 대한 중요성을 간절하게 알게 되었고 감정적으로 구는 행동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말은 최대한 아끼고 생각은 간결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부로 기대하지 않는다. 되는 일들보다는 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흔을 앞두고 기대되는 미래를 그려보기란 여간해선 쉽지 않다. 침울해지기는 훨씬 쉬워졌고 활기를 높이기는 몇 배로 어려워진 것이다. 그러니 하루를 살아내는 게 예전보다 몇 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반면에 쉬워진 것들도 있다. 감정 숨기기, 거짓으로 웃기, 할 말은 하기, 할 말 꾹 참기, 내 스타일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등이다. 할 말을 날카롭지 않게 조금 깎아서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부드럽게 말하는 방법을 모를 땐 자연스럽게 말을 숨긴다. 말은 하는 것보단 하지 않는 것이 어떤 경우에도 좀 낫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말을 하지 않아서 생긴 오해보단 말을 해서 생긴 오해가 더 큰 경우가 많았다. 예전에는 잘 되지 않았던 감정 숨기기도 이제는 어떤 공간에서는 로봇처럼 자동으로 온오프가 된다. 이렇게 조금 편해진 것들도 많지만 어쩐지 자꾸 차가워진다. 


조급한 마음은 삶의 온도를 자꾸 낮춘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차가워지기만 할 순 없다. 나는 내 인생에 어떤 뜨거움을 만들어줘야 할까. 어떻게 조금 삶의 온도를 높여야 초조해하지 않게 되는 걸까.


영화 [안경]에서 사쿠라 할머니는 말한다. “중요한 건, 조급해하지 않는 것. 초조해하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조급한 마음이 될 때마다 영화의 이 장면을 떠올린다. 오래 삶아야 하는 팥을 보며 혼자 읊조리는 말이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든 그냥 기다리든 팥은 언젠가 알맞게 삶아질 것이라는 걸.


조급하게 기다리든, 여유 있게 기다리든 어쨌거나 맛있는 팥빙수를 먹을 수 있다면 굳이 초초해하지 않아도 된다. 팥빙수가 빨리 먹고 싶어 초조해지는 마음이야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어차피 팥빙수를 먹게 된다’라고 생각한다면 초조함을 다스릴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급 해질 땐 이렇게 주문을 외운다.


맛있는 팥빙수를 먹으려면 팥을 삶아야 한다.
팥이 다 익으면 나는 어차피 맛있는 팥빙수를 먹게 된다





쓰는 아도르

사진, 글, 캘리그라피 adore
블로그 : http://jwhj0048.blog.me
인스타그램 : http://www.instagram.com/adore_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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