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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우던 점심에서, 돌보는 점심으로

퇴사 후, 점심시간이 바뀌었다.

by 백수쟁이

점심시간, 직장인에게 짧지만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회사에서 나의 점심시간은 무용했다. 보통 도시락을 먹었다. 식비를 아끼거나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일단 한 시간의 점심시간이 짧았다. 사무실에서 식당가가 멀었고, 밥을 천천히 먹는 나로서는 식사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 들어 나가기 싫었다. 사실 귀찮은 마음이 제일 컸다. 점심 메뉴를 정하는 것도 사무실 밖을 나가는 것도 귀찮기만 했다. 회사에서 먹는 밥 한 끼에 어떤 에너지고 쓰기 싫었다. 그래서 도시락을 챙겨 다녔다. 가끔 점심 회식을 하거나 어쩌다 지인이 여의도에 오면 밖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러다 보니 맛집 많은 여의도에서 5년 넘게 일했는 데도 나만의 맛집이나 단골집 하나 없는 채로 퇴사했다.


작년에 진급을 하고 나서는 도시락마저 먹지 않았다. 회의도 일도 너무 많았다. 압박감에 밥이 넘어가지 않았고, 억지로 먹으면 위나 장이 탈이 나곤 했다. 밥을 안 먹는 게 가장 속이 편하다는 걸 알고 난 뒤, 점심시간을 자리에서 보냈다. 손에서 일을 놓고 쉬기라도 하면 좋았을 텐데 그것도 잘 안 되더라. 바로 정면에서 PC가 자기 좀 봐달라고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으니까.


회사에서의 점심시간은 계속해서 나를 소진시키던 시간이었다.


이제 점심시간은 나를 회복시키는 시간이 되었다. 요즘은 이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있다. 점심시간을 정해두지는 않았다. 어떤 날은 열두 시에 먹고, 또 어떤 날은 한 시가 넘어 챙긴다. 오전 일과가 끝나면, 꼬르륵 신호가 오면 밥을 챙긴다. 일정한 시각에 먹는 것도 좋겠지만, 나의 일과와 몸 상태에 중심을 두고 유동적으로 챙기는 게 내게는 더 맞는 것 같더라고.


집에서 먹을 땐 꼭 만들어 먹으려 한다. 메뉴는 그때 딱 생각나는 것으로 정한다. 얼마 전에는 성시경 유튜브에서 묵은지 김밥 레시피를 보고 즉흥적으로 만들어 먹었다. 예전 같았으면 저장해 두고 나중에 만들어 먹어봐야지 했겠지만, 이제는 재료만 있다면 ‘한 번 만들어 보지, 뭐’하고 시도하는 거다.


점심 약속으로 밖에서 먹는 날도 있다. 이런 날은 보통 상대방이 있는 곳으로 간다. 회사 다닐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땐 여의도 아니면 큰 일 나는 사람처럼 굴었는데, 지금은 약속을 핑계 삼아 밖으로 나가는 게 즐겁다.


점심시간 자체를 즐기려고 노력도 한다. 혼자 먹는 날엔 TV를 켠다. 점심시간에만 잠깐 허용하기로 나 자신과 약속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한 TV 타임이랄까. 그러니 시청할 영상을 신중하게 고르게 되더라. 다른 사람과 먹을 땐 대화를 많이 나누려 한다. 음식 얘기, 시답잖은 농담, 고민을 나누며 그 시간을 충만하게 보낸다. 음식 사진도 정성스레 찍는다. 여태 내게 음식 사진은 증빙용 영수증이었다. 남편에게 어디에서 무얼 먹고 있는지 공유하는 차원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그냥 나의 기억용이다. 밥 먹는 일상을 기억하고, 가끔 떠올리고 싶어서.


가만 보면 회사에서의 점심시간은 나의 점심시간이 아니었다. 오후 업무를 열심히 하기 위해 잠깐 쉬고 밥을 먹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반납하고 일을 하기도 했으니 정말 내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다르다. 매일의 점심시간이 나의 것이 되었다. 오전의 일과를 끝내고 충만감으로 밥을 차리거나 밖으로 나간다. 점심시간도 음식도 참 소중하다.


매일 먹는 점심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회사의 점심시간에 ‘나’는 없었다. 그저 때우는 시간이었다. 간단히 끼니를 때우거나 오전에 못한 일을 때우거나. 언제나 일이 가장 중요했으므로 나는 뒷전이었다. 더 이상은 아니다. 때우는 시간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시간이 되었다. 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이 시간이 나를 챙기고, 돌보고, 기쁘게 하는 걸 알게 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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