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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기로 한 퇴사, 나만 했다.

남편과 함께 퇴사하기로 약속했는데

by 백수쟁이

하루에도 몇 번 퇴사를 고민하던 나, 남편도 그랬다. 퇴사 이야기를 참 많이도 나누었다. 그 시기, 남편에게 조심스레 제안했다.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하되 한 사람이 퇴사하면 나머지 한 사람도 퇴사하자고.


둘이 벌어 겨우 먹고사는 우리, 한 사람만 일을 그만둬도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런데 함께 퇴사를 하자니, 남편은 놀란 눈치였다. 차근차근 그를 설득했다.


당연히 둘이서 버는 게 좋고, 안 되면 한 사람이라도 돈을 버는 게 그나마 안정적이긴 하겠지.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달라. 언제 우리가 함께 쉬어 볼 수 있겠어? 늙어서 함께 쉬는 게 무슨 소용이야. 아무것도 못 할 텐데. 체력이 있을 때 시간도 있어야 뭐라도 하지. 그러니 쉬면서 우리 둘의 시간을 좀 갖자. 경제적인 안정은 좀 흔들릴지라도 우리 둘 사이에서 얻는 또 다른 안정이 분명 있을 거야.


진심이었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죽어라 일해야 할 텐데, 그러다 언제 같이 쉬면서 시간을 갖겠나 싶었다. 남편은 내 말에 솔깃했다. 이참에 같이 해외에 나가 한 달 살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각자 한 날 남짓 외국에 나가 지낸 적은 있지만, 함께 오랜 시간을 해외에서 보낸 적은 없었다. 태국을 좋아하는 그에게 한 달 살기 비용을 내가 내겠다고 꼬셨다. 그는 완전히 넘어왔는지 태국 한 달 살기 플랜을 세우고,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퇴사를 이야기 한 5월의 어느 날, 남편에게도 이 소식을 알렸다. 오랫동안 퇴사 이야기를 했던지라 그동안 수고했다고 이제 푹 쉬라며 나를 보듬어 주었다. 이제 남편만 남았다. 그는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 퇴사 얘기를 하겠노라고 했다.


6월, 나는 퇴사를 했다. 그런데 그가 돌연 퇴사하지 않겠단다. 회사 생활이 전보다 많이 좋아져 당장 그만 둘 이유가 없으며, 한동안 수입이 있으면 좀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마음이 복잡했다. 함께 퇴사를 하지 않는 게 얼핏 서운하면서도 퇴사를 종용한 것 같아 내 자신이 철부지 같았다. 좀 더 다녀보겠다는 게 안쓰럽고, 한동안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을 거란 말에 든든하고 고마웠다.


남편이 퇴사하면 당장 태국에 가는 게 내 계획이었는데 차질이 생겼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파워 J이지만 별 수 있나, 일상을 잘 사는 수밖에. 일상에 집중하며 살고 있다. 모닝페이지로 정신을 스트레칭으로 몸을 깨우며 아침을 시작한다. 그 후 남편을 깨우고 아침밥을 챙겨준다. 회사 다닐 땐 생각도 못한 것을 해줄 수 있어 참 좋다. 남편을 출근시키고는 글을 쓰고 읽는 일을 반복한다. 오후엔 집 청소를 하거나, 병원이나 도서관에 간다. 저녁엔 멍하니 쉬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남편의 퇴사가 미뤄진 건 혹시 내 일 상을 먼저 챙기라는 뜻 아니었을까. 어디론가 떠나는 것보다 지금 이곳에서 잘 살아내는 게 내게 더 필요했던 건 아닐까. 일상이 먼저이고, 가장 중요하니까.


함께 퇴사해 여행을 떠나기로 한 약속은 미뤄졌다. 대신 하루하루를 이곳에서 나의 속도로 살고 있다. 틀어진 건 계획뿐, 일상은 틀어지지 않았다. 미뤄진 약속 대신, 매일 오늘을 잘 살아내기로 약속하며 하루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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