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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득 Mar 03. 2024

일기-전편

240303

 나의 어린 시절은 생활공간이란 것이 마땅치 않았다. 생계를 책임져주는 작은 중국집이 나의 잠자리이자 공부방이며 주방이었다. 손님을 받기 전 어두컴컴한 주방에서는 칫솔질 소리와 물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학교를 다녀와서는 서빙을 하기 바빴고 어두워지면 다락방에 이불을 펴고 잠들었다. 중국집보다 짜장집이란 이름이 어울리는 그 작은 공간이 우리의 삶이었다. 점점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치열함을 강요받으며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중국집 간판이 사라졌다. 정육점을 겸하는 고깃집으로 업종을 변경한 것이다. 뭐가 되었든 지긋지긋한 삶이 조금은 달라질 것 같았기에 미소가 번졌다. 늘 새로운 것은 설레기 마련이다. 물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점점 발길이 끊겨가던 중국집보다는 고깃집을 찾는 손님이 더 많아졌다는 것 정도였다. 다들 주머니가 예전보다는 두둑해진 모양이었다.


  부모님의 선택은 나에게 실질적인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옷에 배어있는 향이 기름냄새에서 고기 비린내가 되었다는 것 말고는 사실상 모든 것이 똑같았다. 예전에 먹지 못하던 계란 한 판을 걱정 없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변한 부분이다. 그런 것은 하루이틀이면 익숙해져 그리 대단하다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전자기기도 한 달만 지나면 늘 있는 TV와 대우가 다를 것이 없어지지 않는가.


 현실적으로 내가 이곳을 빨리 떠날 수 있는 방법은 결혼뿐이었다. 마땅한 꿈도 없었을뿐더러 그런 꿈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도 못했다.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을 대여섯 살 때부터 들어왔기에 내가 꿈꿀 수 있는 미래는 자연스럽게 제한되었다. 그 이상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기에 딱히 불행하지도 않았다. 수업 중 듣게 된 현모양처라는 단어는 나의 미래를 점지해 주는 듯했다.


 그래도 공부는 잘하는 편이어서 대학은 갈 수 있었다. 그 무렵 집안 사정이 썩 나쁘지 않았던 것도 잘 맞물렸다. 처음으로 대학에서 해방감을 느꼈고 가끔은 집이 그립기도 했다. 그래서 원래 목표처럼 도망치 듯 결혼을 했다. 그렇다고 진정한 사랑 없이 결혼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만족하며 집안의 약간의 우려를 무릅쓰고도 결혼했다. 이기적이란 말을 듣고 어떤 지지도 받지 못했다. 정말 내가 몹쓸 인간인가 회의도 많이 들었다. 또 보란 듯이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엔 세상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1년 만에 힘겹게 생긴 아들에게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처럼 살게 하기는 싫었다. 궁핍한 사정에도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나중에 잘해주지 못했다는 후회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쏟아내고 보니 내게 남는 것은 공허함과 눈물뿐이었다. 현모양처가 되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떤 게 좋은 엄마인지는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내게 좋은 부모가 없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원망도 깊어져갔다. 매일같이 가슴이 답답해지기 일쑤여서 아이를 데리고 집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목적지 없이 빙빙 돌아다녔다.




*모든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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