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난 사람, 그를 보내는 법

by 정필

아빠의 마지막 직장은 외로운 곳이었다. 다같이 있지만 혼자 일하는 곳. 의견을 교환하거나, 협력하거나 하는 일이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아빠는 일주일에 한 번만 집에 왔다. 평일 내내 직장과 가까운 곳에 방을 얻어 살면서, 외로운 일자리를 몸으로 지켰다. 아빠는 일터에서도, 숙소에 와서도 외로웠을 것이다. 아빠가 마지막 숨을 내쉬었던 아빠의 숙소 냉장고 한 켠에 붙어있던 몇 개의 배달음식점 전단이 눈에 선하다.


아빠는 집에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만 다녀갔다. 나는 그보다 더 띄엄띄엄 집에 다녀갔다. 이십 대 중반의 나는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여기 저기로 쏘다녔다. 처음 세상을 만난 사람처럼, 세상 곳곳을 탐험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시간과 아빠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줄 전혀 알지 못했다. 아빠는 혼자 일하고 혼자 지내며 내 생활에 필요한 돈을 대 주셨다. 나는 그 돈의 댓가가 무언인지도 모른 채, 신나게 내 세상을 돌아다니기 바빴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였다. 타지에서 직장을 구해 나도 자취를 시작하게 됐다. 하루종일 긴장한 채로 일과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텅 빈 집이 나를 더 쓸쓸하게 만들었다. 청년에게도 빈 집은 쓸쓸한 것이었는데, 중년의 아빠에게는 어떠했을까.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지나고 나서야 아빠를 다시 한 번 헤아려 본다. 그조차도 일방적인 헤아림일 뿐, 이제 무슨 수를 써도 아빠를 헤아려 위로할 수는 없다.


나는 신나게 이십 대를 보내느라 군대도 늦게 갔다. 스물 여섯에 입대해 스물 여덟에 제대했다. 내가 절반 정도 복무를 마쳤을 때, 아빠는 혼자 있는 자그마한 방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셨다. 직접 사인은 심장마비. 아빠는 지병이 있으셨다. 마침 그 무렵 잦은 추가근무와 혼자 지내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빠는 홀로 주무시다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잠을 깨지 못하셨다. 출근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직장 동료가 며칠만에 엄마에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하루 이틀 쯤 무단결근을 해도 서로 찾지 않는 직장, 출근하면 자기 일만 하다 갈 뿐인 직장, 아빠가 마지막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그곳이 나는 참 외롭게, 쓸쓸하게 다가온다. 내가 사는 세계에서는 하루가 아니라 5분만 늦어도, 아니 출근 5분 전에라도 나타나지 않으면 득달같이 전화가 온다. 며칠이나 지나서 그제야 연락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빠가 품고 지내셨을 외로움의 온도를 느끼게 한다.


아빠가 돌아가실 당시 나는 군인이었다. 평소와 별 다를 것 없는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절반 정도 지난 군생활, 처음보다 긴장도 덜하고 어느정도 적응도 되어서 익숙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시기였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저기 멀리서 중대장이 전화기를 들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나를 찾으러 여기 저기로 뛰어다닌 모양인지 나를 발견하자마자 큰 소리로 부르면서 뛰어왔다. 중대장이 들고있던 핸드폰은 통화중이었고, 전화기를 넘겨 받으니 울먹이는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생이 뭐라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빠야, 아빠가….” 까지만 기억난다. 부랴부랴 휴가 준비를 하고, 파주에서 대구까지 먼 길을 나섰다.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 한 명에게 아빠의 부고를 알렸다. 기차에서 눈물이 얼마나 나는지, 통화를 하면서도 울고 끊고 나서도 목놓아 엉엉 울었다.


그때부터는 기억이 잘 안난다.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다. 장례식장에 먼저 갔는지, 아빠가 지내던 숙소에 먼저 갔는지 모르겠다. 아마 장례식장에 먼저 갔을 것이다. 나도 슬펐지만 엄마를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장례를 치뤄야 하니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다행히 동생이 근무하던 곳이라 장례식장도 해결되었다. 많은 사람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쳐가는 여러 사람들 기억이 난다. 많은 손길이 나를 토닥여 주었다. 북적거림과 위로는 배경음으로 기억되지만, 울던 엄마의 손을 잡은 감각과 엄마와 동생을 같이 부둥켜 안고 있던 감각은 생생하다. 거대한 슬픔 앞에서 우리 셋만이 당사자였다.


그 때 휴가는 9일 정도였던 것 같다.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해 아빠의 유해를 납골당에 안치시켰다. 엄마와 동생과 함께 아빠가 지내던 숙소를 정리했다. 특별히 아빠가 우리에게 남겨주고 싶었던 물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빠의 손때 묻은 수첩, 매일 입었던 작업복, 덮고 주무시던 이불 같은 것들을 정리했다. 아빠의 수첩엔 노래 가사가 적혀 있었다.


내 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대만을

사랑하다 죽으렵니다 - 알리, <서약> 중


고요한 방에서 아빠는 이따금 노래도 하고, 드라마도 보셨겠지. 매일 눈 뜨고 눈 감을 때 혼자였지만, 먼 곳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지내셨겠지. 이제 나는 어렴풋이 이해한다. 외로웠을 아빠의 생활을. 그리고 그것을 견디게 했을 사랑을.


아빠의 욕실에는 새 면도기가 하나 있었다. 새 것은 아니지만 오래된 물건, 그러니까 뜯지 않은 면도기가 있었다. 많은 남자들에게 그렇듯, 면도기는 이상하리만큼 비싸게 여겨진다. 더 비싼 술값은 턱턱 내면서, 면도기 사는 것은 그렇게 심사숙고 한다. 그래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하셨던 건지 모르지만 아빠는 일평생 일회용 면도기만 사용하셨다. 목욕탕에 가면 200원에 파는 면도기. 그걸 박스째로 사다가 욕실에다 두고 사용하셨다. 집에서도, 그리고 일하러 나간 그 숙소에서도. 내 수염이 아빠 수염보다 두껍진 않았을텐데, 나는 5중날 6중날을 썼다. 군대에 가 보니 보급품으로 주는 면도기도 5중날쯤 되었다. 집안에 면도를 하는 사람이라곤 나와 아빠가 유일한데, 군에 가서 면도기를 보급받고 나니 아빠 생각이 났다.


군대에서 맞는 두 번째 정기휴가 쯤이었을까, 엄마와 함께 아빠가 일하는 도시로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아빠 퇴근시간에 맞춰 아빠 회사 앞에서 만났다. 부대찌개를 한 그릇 사 먹고, 근처 연못을 걸었다. 아빠를 숙소에 데려다 주고 엄마와 나는 집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차를 몰고 몇 분 쯤 갔을까, 혼자 지내던 아빠 숙소의 화장실이 떠올랐다. 엄마에게 아빠 화장실 청소만 해 주고 집에 가자고 제안했다. 근처 마트에 들러 청소도구를 사고, 아빠의 일회용 면도기가 떠올라 면도기도 좋은 것으로 하나 골랐다. 집에 간 줄 알았던 아내와 아들이 다시 오니 아빠는 반가워했다. 군대식 치약미싱으로 아빠 화장실을 좀 닦고, 새 면도기를 건네 드렸다. 이제 일회용 면도기 쓰지 말고 이거 쓰시라고.


아빠는 그 면도기를 쓰지 않으셨다. 안 쓰신 건지 못 쓰신 건지 모르겠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친구들 처럼 조금 일찍 취직했더라면, 조금 더 일찍 아르바이트라도 했더라면 아빠에게 뭐라도 해 드릴 수 있었을까. 나는 받기만 했는데, 이제 갚아드릴 수 있는 아빠는 없다. 화장실 청소라도 해 드리길 잘했다고 위안삼지만, 그건 그냥 남은 나의 정신승리 비슷한 것일테다. 아빠가 계셨으면 우리 집에도 초대하고, 손녀딸도 안겨드리고, 아빠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도 대접하고, 예쁜 바다 구경도 실컷 시켜 드렸을 텐데. 정말 몰랐다. 아빠의 시간과 내 시간이 전혀 다르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 모든 것이 갑자기 끝날수도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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