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셉 Aug 29. 2023

코로나 처음 걸린 썰

아팠어요, 아파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지난주 금요일부터 머리가 안쪽에서부터 쟁쟁 아파오기 시작했으니, 코로나 증세가 나타난지 오늘로 4일이 되었다. 19년도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고, 일상의 여러 모양들을 바꿔놓을 때에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병을 무서워하면 더 잘 걸린다며, 근거 없는 소리를 하며 큰소리를 쳤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냥 운이 좋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처음 발병한 이래 한 번도 코로나에 감염된 적이 없었다. (백신은 꼬박꼬박 맞았다) 은근히 아직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것을 자랑스레 여기기도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으레 “야, 너 그냥 무증상으로 지나간 것일 수도 있어.” 라며 으스대지 말라는 투로 이야기하곤 했다. 나는 ‘무증상’인 질병이 어디 있냐며 대꾸했지만, 내심 그런가 보다, 다행히 쉽게 지나갔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4일 전부터, 이런 대화가 무의미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실제로 코로나에 감염된 적이 없으며, 내가 별 것 아닌 것으로 취급했던 코로나 바이러스는 실제로 굉장히 아팠다. 아파 누워 있으면서 무증상으로 지나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최근 몇 년 동안 잔병치레 한 번 없이 지내왔던 터라 몸이 더 격렬하게 반응했다. 마치 몇 년간 힘을 비축해 온 면역세포들이 한꺼번에 다 출정해 온몸을 전쟁터로 삼아 바이러스와 싸우는 듯했다. 온몸이 펄펄 끓는데 이상하게 너무 추웠다. 이불을 덮자니 열 배출이 안될 것 같고, 그렇다고 안 덮자니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머리에만 물수건을 올려놓고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다 깨다를 몇 날을 반복했다. 늘 하던 일상적인 활동도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잠을 잘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가만있질 못하는 성격의 나로서는 매우 힘든 며칠을 보냈다.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약을 먹고 조금 괜찮아지면 덜 아프다가, 약 기운이 떨어지면 더 아프고, 또 약을 먹으면서 버텼다. 여전히 미열과 두통, 인후통은 남아있지만 읽고 쓰는 활동을 할 수 있는 정도까지 되어서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 


    아내는 나보다 3일 정도 코로나를 먼저 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 코로나에는 걸리지 않는 몸인가 확신하고 있었다. 아내에게도 “나는 안 걸려” 라며 큰소리를 쳐대다가, 아내보다 10배는 더 중증을 맞아 주말 내내 골골댔다. 아내는 개학을 맞아서 심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는 시기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별 수 없이 아내에게 신세를 져야 했다. 나는 잠도 가만히 못 자서 아내가 계속 머릿수건을 갈아줘야 했고, 또 약을 먹으려면 밥도 해 먹여야 했고, 차도 끓여다 줘야 했다. 


    오랜만이었다.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낀 게. 이렇게 아파본 것도 근래에는 없는 것 같다. 아내도 완전히 다 낫지 않아 컨디션이 안좋았을 테지만 옆에서 여러 모양으로 정성스레 간호해 주었다. 코로나를 털어내면서, 아내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아파 누워 있으면서 그동안 일상이라고 불렀던, 어쩌면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이루고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게 되었다.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 안락한 수면, 아침을 깨우는 충만함과 기대감, 모닝페이지, 만년필 소리, 읽고 쓸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한 듯 보이고 때로는 반복되기만 하는 듯하여 지루할 때도 있었는데 몽땅 없어지고 나니까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매일의 일상에서 감사나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꼭 가끔씩 이렇게 몽땅 다 잃어버려 봐야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 같다. 다 가지고 있을 때는 아무리 잘 쳐줘도 반쪽짜리 인식밖에 안 된다. 없어 본 적이 없는 데 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없음, 결핍을 통해 있음과 풍요를 배워야 하는 것이 인생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역설 속에 큰 깨달음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없음을 알지 못한 채 ‘있음’만을 경험한 사람은 반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없음을 모르고도 있음을 모두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것은 다다르기 어려운 경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젊은이는 젊음을 알 수 없고, 건강한 사람은 건강을 알 수 없다고 하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너무도 당연하게 ‘있는’ 것들이 없다면 어떨까. 없음을 생각하면서 이미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엔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건강을 잠시 빼앗겼지만, 종종 ‘없다면’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사진 출처 : http://www.pixabay.com/   

작가의 이전글 결핍을 새롭게 바라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