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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Aug 29. 2023

내게 글쓰기는 빼앗길 수 없는 기쁨

   ‘어쩌다가’ 글을 쓰게 되었다. ‘어쩌다가’라고 한 것은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글이 쓰고 싶었다. 처음에는 ‘왜’ 쓰고 싶은 건지 찾아보려고도 했으나, 이왕 쓰고 싶다고 느끼는 바에야 이유를 찾아 무엇하겠나 싶었다. 이유를 찾건 찾지 못하건 쓰고 싶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차라리 무엇을 쓸까 고민하는 게 더 나아 보였다.


   하고 싶은 게 있다는 일은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 마음속에 아이 같은 구석이 한 군데쯤 남아 있다는 것이 아닌가.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새로운 것을 봐도 궁금해하지 않는 아이가 한 명 있다고 해보자. 이 아이가 내 아이라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으스스하다. 아무 데도 흥미라곤 없는 아이가 있다니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아이들은 뭘 좋아하면 그냥 한다. 평가받아야 하는 겁쟁이 어른처럼 굴지 않는다. ‘나는 왜 흙 쌓기를 좋아하는가’, ‘나는 왜 공놀이를 좋아하는가’ 따위의 질문을 하는 어린아이는 없다. 아이들은 좋아하는 행위를 마음껏 하면서 그곳에서 답을 찾는다. 


   30살이 훌쩍 넘은 내 안에도, 아직 아이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부턴가 아이처럼 살지 못하고 어른처럼 굴려고만 했기 때문에 아이는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틀고 숨어버렸다. 재미를 즐기는 아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아이, 자기 자신을 마음껏 표현해 내는 아이는 마음 깊이 숨어버렸고, 어른 행세 하는 껍데기만 남았다. 아이가 자신의 흥미나 마음 상태에 먼저 귀를 기울인다면, 어른 껍데기는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먼저 생각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안 주고 문제가 아니다. 아이는 자기가 즐거우면 그림일기장에 무엇이든 그리지만, 어른 껍데기는 이게 담임선생님이나 부모님, 친구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느라 아무것도 그리지 못한다.


   너무 어른 껍데기 흉내를 내며 살아왔다.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도 모르고 남들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간판 좋은 대학에 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껍데기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바빴다. 그러는 동안에 나의 아이는 점차 작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가 살아있긴 했나 보다. 글을 쓰다 보니 어른 껍데기가 좀 벗겨지고 아이가 보였다. 아직도 껍데기 습성이 남아있어서 이런 자문을 종종 하기는 한다. ‘그게 돈이 되나?’ (남들 보기에 내세울 수 있나), ‘그럴싸한 글인가’, 같은 질문 말이다. ‘잘’ 썼는가 고민하는 것도, 결국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껍데기 어른이 주는 생각이다. ‘잘’ 썼는가? ‘흠잡을 데 없는가?’ 이런 고민할 시간에 글을 쓰자고 생각했다. 물론 발전을 위한 ‘잘’은 얼마든지 반겨야 하는 생각이다. 껍데기 어른의 ‘잘’은 가상의 누군가의 눈에 ‘잘’ 보여야 해서 결국은 못 쓰게 되는 ‘잘’이다.


   내게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즐거움이다. 아이에게서 장난감을 빼앗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이의 천진함과 호기심은 빼앗아 가지 못한다. 아이처럼 글 쓰고 싶다. 아이처럼 마음껏 글 쓰고 싶다. 배운 티를 내고 싶어 하는 인텔리처럼 행세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는 안다. ‘왜’ 쓰는가, ‘쓸 만한 것’이 내게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하나마나한 것이라는 것을. 놀이에 몰두해 있는 아이를 보며 깨닫는다. ‘왜’를 찾기 전에 몰두한다. 몰두한 다음에 그 행위를 통해 ‘왜’를 찾는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인 이유를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모험을 두려워하는 껍데기 어른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매일 무엇을 쓰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면서도, 쓰면 또 써진다. 매일 왜 쓰는지 고민해 왔지만, 결국 납득할만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쓰고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 다음의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을 쓸 것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글쓰기이다. 지난날 ‘무엇을’ 쓸지 고민하고 결정하고 나서야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것이야 말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 식으로는 결코 글을 쓸 수 없다. 한두 번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마치고 글로 써내기만 하면 될지는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글쓰기를 지속할 수는 없다. 정말 써야 하는 글이 있다면 글을 쓰면서만 찾을 수 있다. 일단 쓰면 무엇을 쓰고 싶은지 찾게 된다. 마찬가지로, ‘왜’ 글을 써야 하는가도 이유를 말끔히 찾아놓고 시작할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글쓰기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말장난처럼 보이긴 하지만, 짧은 기간이지만, 글을 쓰기도 하고 타인의 글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고, 무엇을 쓸지 찾아가는 과정이 글쓰기이며, 글을 쓰는 이유도 글쓰기를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 


   여전히 재고 따지는 껍데기 어른이 행세하는 나의 내면이지만, 더 아이처럼 글을 쓰고 싶다. ‘남들’ 보기에 좀 못난 글이면 어떤가, ‘잡문’도 좀 써본 경험이 있어야, 언젠가는 또 좋은 글도 쓸 수 있다고 믿는다. 


   천진하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글쓰기에 푹 빠지고 싶다. 이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을 쥐고 평생을 살아가고 싶다. 글을 왜 쓰느냐는 물음에는 글로 대답하고 싶고, 쓰고 또 쓰면서 내가 써야 하는 글에 근접해 가고 싶다. 


   ‘내게 쓸만한 것이 있는가’라든가, ‘나는 왜 쓰는가’ 따위의 자문은 이제 하지 않겠다. 다만 글을 써내려 감으로써 내 속의 아이가 쓰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것을 한 단어 한 단어를 사용해 글로 쌓아 올리고 싶다. 그러니 이제 순서가 틀려먹은 자문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기 전에 글을 써내려 갈 것이다. 


   글을 맺고 올리려고 하는데 또 나를 괴롭히는 생각이 하나 있다. ‘자유롭게 쓰는 거야 네 사정이고, 그걸 꼭 올려야 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글을 공개하는 행위야 말로 ‘잘’ 쓰라고만 강요하는 녀석에게 저항하는 행위라고. 저마다 부족한 면이 있고 어딘가 빠지는 부분이 있지만, 완벽하지 않지만 생각과 삶을 글을 통해 공유하고, 서로 용납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잘’ 쓰지 않아도 괜찮구나 깨닫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잘’ 쓰는 날도 오겠지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잘’ 쓴 글이란 애초에 없다고, 나는 그냥 글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진 출처 : www.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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