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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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잘 지내고 계시죠? 계신 곳이 어디인지, 그곳은 어떤 곳인지 몰라 그저 잘 지내시냐는 인사를 드립니다. 가을도 어느새 끝에 다다르고, 아빠와 제가 헤어졌던 달이 되었네요. 여기는 포근한 가을날이 며칠 이어지나 싶더니, 비가 한 차례 내리고 난 후에 갑자기 추위가 찾아왔어요. 가을 하늘을 수놓던 단풍잎이 낙엽이 되어 바닥에 뒹구는 걸 보면서, 초겨울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그제야 벌써 11월이구나 깨닫게 됐어요. 아빠가 떠나가신 이 달은 제게 있어 숫자나 달력에 있다기보다는, 찬 바람 속에, 낙엽 속에, 때로는 푸른 하늘 속에 있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아빠와 만났던 때가 생각이 나네요. 11월의 첫 번째 토요일이었어요. 군에 입대한 지 1년에서 열흘 정도가 빠지는 날이었어요. 한참 힘든 이등병 시절에는 면회 한 번 안 오시더니, 그날은 어떻게 멀리까지 와 주셨어요. 아빠도 몰랐죠? 그게 마지막 만남일 줄. 아빠는 제가 군인이 되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셨죠. 직업 군인도 아니고, 장교도 아니고, 그냥 누구나 다 하는 의무 복무였는데 그게 뭐가 대단한 일이라고 말이에요. 그 덕이었을까요. 처음엔 ‘남들 다 하는 거 버텨야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빠가 워낙 자랑스러워해 주시니까 괜히 힘이 나는 거 있죠. ‘이왕 하는 거 멋지게 군생활 하자’로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아빠 덕에 군생활 멋지게 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빠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군생활 했는데, 그때도 많이 힘이 됐어요. ‘나는 아빠가 자랑스러워했던 군인이다.’고 생각하면서 나를 달래곤 했어요. 그때는 왜인지 고맙다는 말을 못 했어요. 뭐가 그렇게 쑥스러운지, 아빠 하고는 늘 필요한 말만 했던 것 같아요. 용돈 달라, 등록금 달라, 방세 달라 같은 것들 말이죠. 조금만 더 일찍 어른이 되었다면, 조금만 더 일찍 아빠를 이해하려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때늦은 후회를 한 번 해 봐요. 지금 아빠가 살아계셨더라도 아마 쑥스러워서 못 하긴 했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경상도 남자 특징. 그렇지만 이미 가셨고, 마음에는 못다 드린 말이 많이 남았으니 이렇게라도 적어 봐요. 어디엔가 아니면, 최소한 저에게라도 털어놔야 되겠다 싶어서요.
‘아빠 보고 싶어요.’
‘아빠 일 하시는 건 어떠세요?’
‘아빠 생신인데 필요한 건 없으세요?’
‘일 하시느라 힘드시죠?’
‘아빠 사랑해요.’
‘아빠 고생하셨어요.’
조금만 더 일찍 아빠를 생각했더라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하고 너무 늦은 후회를 해 봅니다. 아빠도 처음 사는 인생 외롭기도 하고 때로는 막막하기도 했을 텐데, 친구가 되어 함께 걷지 못하고 늘 등에 업혀만 있었다는 생각에 참 아빠께 죄송한 마음이 드네요. 다시 만날 그곳에서는 제가 더 잘해드릴게요.
좋은 인생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해요. 두 분 부모님이 아니었으면 저라는 사람은 세상에 없었을 거예요. 두 분을 통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생명을 전달받을 수 있었어요.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운 일이에요. 나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두 분도 저처럼 어설프게 가정을 꾸려 나가셨겠죠. 처음 살아보는 삶이라 서툴고 많이 가지지 못해 부족했지만 늘 넘치도록 사랑해 주시고 저와 동생에게 많은 자원을 나눠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멋진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었어요. 생명을 선물로 전달해 주시고, 저를 잘 양육해 주셔서 살아갈 인생까지 미리 선물로 주셔서 감사해요. 어린 시절 아빠가 심어 주신 좋은 성품의 씨앗이 어느새 제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고마워요 아빠. 제가 사는 곳과 아빠가 계신 곳은 너무 아득해서 제가 아빠께 갈 수도, 아빠가 제게 올 수도 없지만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기로 해요. 저도 받은 씨앗들 잘 길러서 더 좋은 어른이 되도록 할게요. 아빠에게는 나중에 갚아드리는 걸로 하고, 여기서 사는 동안 이곳에서 책임을 다 하고 갈게요. 아빠가 남겨 두고 가신 한 인생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 것인지 거기서도 보일 만큼 멋지게 잘 살게요.
열흘 정도 뒤면 아빠랑 헤어진 그날이네요. 평소에도 문득문득 아빠 생각이 나지만 이번 달은 하루에도 몇 번씩 아빠를 떠올리게 되네요. 아마 앞으로는 아빠 생각이 더 자주 날 것 같아요.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 서툴기 때문인지, 내 나이 때 아빠는 어떻게 살았을까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거울을 보면 점점 아빠를 닮아 가는 것 같아서, 어째 이제는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날 것만 같아요.
저는 아빠가 좋아하시던 여자친구랑 결혼했어요. 결혼하는걸 아빠가 보셨으면 참 좋아하셨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아내도 아빠를 좋아했는데 말이에요. 지금 와 가만 생각해 보니 아빠는 저와 제 삶을 참 좋아해 주셨던 것 같아요. 대단한 뭔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저라는 사람 자체를요. 군인이 되는 것도 뭐 특별할 게 없잖아요. 하다 못해 해병대나 무슨 특수부대 같은 것도 아니고 말이죠. 대학에 갈 때도, 여자친구를 데려 왔을 때도, 생뚱맞게 중국으로 유학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요. 돌아보니 아빠는 그냥 저를 기뻐해 주셨던 것 같아요. 내세울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저라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빠에겐 자랑이 되고 내세울 거리가 되었던 것 같아요. 아빠도 말로는 잘 못하셨지만, 이거야 말로 사랑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네요. 저를 기뻐해 주고, 자랑스러워해 주셔서 감사해요.
적다 보니 계속 후회만 남는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지네요. 만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많이 보고 싶은가 봐요. 인생에 2회 차 같은 게 있다면 다음번엔 잘해보리라 생각하겠지만, 한 번뿐인 게 인생이잖아요. 남은 인생 후회하지 않게 살아 보려고요. 선물 같은 이 인생 다 살고 나서 후회할 것들만 자꾸 떠오르면 그때는 마음이 더 아플 것 같거든요. 아빠는 일찍 가셨지만, 가시면서 많은 교훈을 남겨 주고 가셨어요.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이라는 것. 때늦은 후회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삶에 대한 고마움, 아빠가 심어주신 제 안의 좋은 성품과 자질의 씨앗들을 잘 보살피고 키워야겠다는 깨달음 같은 것들 말이에요. 그리고 대상을 그 자체로 기뻐하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 까지요. 아빠, 삶을 내어 주시고 온 인생으로 가르쳐 주신 것들 잘 품고 살게요. 제게는 값나가는 유산보다 이것들이 더 값진 가치에요. 가격으로 못 매기는 제 인생을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여기서 다 살고, 다시 만나는 그때 우리 많이 이야기 나눠요.
부칠 길이 없어요. 어디에다가 보내야 아빠한테 닿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일단 써 봐요. 사랑해요 아빠. 잘 계세요. 고마워요.
중국가서 처음으로 배웠던 노래 가사를 적어 봤어요. 이따 목청껏 한번 불러 봐야겠어요.
노래 : 젓가락 형제_부친
사진 출처 :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