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읽고, 쓰다 (4) - 노를 든 신부

by 숨CHIP

제목 : 노를 든 신부

작가 : 오소리

출판사 : 이야기꽃




화면 가득 굵고 거친 색들이 부딪히고 뒤엉킵니다. 그 중심을 가로지르는, 약간은 무섭기까지 한 검은 흐름은 무언가를 급히 가린 듯 그 생김새가 엉성합니다. ‘노를 든 신부’라는 제목만 생각하며 표지를 넘기다 깜짝 놀랐습니다.


작가 이름 왼편에 녹아서 흘러내릴 듯이 의자에 앉아 있는 여성이 있습니다. 마치 ‘이제 끝났다!’, 하는 모습입니다. 한 권의 그림책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고된 작업인지 공감이 가는 모습입니다.


‘힐스’에서 그림책을 공부하였다길래 찾아보았습니다. 힐스(HILLS), 그림책 작가공동체 HILLS는 한국일러스트레이션 학교로서 창작 그림책을 전문으로 배우는 곳이라고 합니다. 홈페이지는 없고 검색 기사도 2015년 이후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다음 브런치 글 중 2017년에 힐스에 입학하였다는 글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듯합니다. 주변을 수소문해 보니 그 당시에는 창작 그림책을 알려주는 교육기관이 귀해서 힐스는 꽤 유명했고 현재 활동하는 그림책 작가 중에는 힐스 출신이 많다고 합니다.


작가 소개 아래 큐알코드에 접속하면 유튜브로 연결되어 그림책 내용으로 만든 동요가 나옵니다. 제일 밑에 있는 큐알코드는 출판사 온라인 리플릿으로 연결되는데 거기에서 노를 든 신부를 찾아보니 어린이 인권도서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외딴섬에 눈, 코, 입이 앙증맞은 소녀가 있습니다. 소녀는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나무 그림처럼 심심합니다. 친구들이 신랑과 신부가 되어 섬을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소녀도 신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섬을 벗어나고 싶었고 낯선 곳으로 모험을 떠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랜 섬 생활에 익숙해진 탓인지 몸과 하나가 된 의자를 단박에 벗어나는 건 쉽지 않아 보입니다.

부모는 딸의 결심을 자랑스러워하며 흰 드레스와 노 하나를 선물합니다. 드레스를 입자 신부가 된 소녀는 한 손에 노를 들고 집을 나섭니다. 바람 부는 들판을 가로지르며 바닷가로 나아갑니다.

바닷가에는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고 배들마다 신부와 신랑이 섬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돛을 높이 펼치고 먼저 바다로 떠난 배도 보입니다. 노를 든 신부도 신부를 찾는 배들을 발견하고 다가가지만 갈 때마다 똑같은 대답을 듣습니다.


미안하지만, 노 하나로는 갈 수 없어요.


자세히 보니 작은 배에 타고 있는 신부들은 모두 두 개의 노를 잡고 있습니다. 신부는 섬을 돌며 배를 찾았지만 노를 하나만 가진 신부를 태워줄 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끝내 바닷가에서 배를 찾지 못한 신부는 발길을 돌려 산으로 향했습니다. 꼭 섬을 떠나야지만 모험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산에서도 충분히 모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신부는 파란 하늘 아래 알록달록한 잎을 달고 새의 깃털을 땅에 심어 놓은 것처럼 하늘로 쭉쭉 뻗은 나무들을 지나 산으로 들어갑니다. 산 중턱쯤에서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신부가 가진 노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를 따라가 보니 바람 부는 산 중턱에 노를 들지 않은 신부들이 아주 기다란 배에 타고 있습니다. 그는 노를 든 신부에게도 자신의 배를 탈 것을 권유합니다. 신부들이 많이 있으니 외롭지 않을 거라면서요. 노를 든 신부는 짧게 고민하더니 다시 길을 떠납니다.

산을 오르다 보니 정상에 다다랐습니다. 산의 꼭대기에는 거대하고 호화로운 유람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도 신부에게 배를 탈 것을 권유합니다. 이 배를 타면 모두의 부러움을 살 거라면서요. 노를 든 신부는 단번에 거절하고는 바람을 거스르며 푸른 들판이 가득한 산에서 내려갑니다.


산에서 내려온 신부는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숲을 걸으며 생각합니다. 신부가 배를 타려는 목적은 낯선 곳으로의 모험을 떠나고 싶어서입니다. 외로움이 싫거나 남들의 부러움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럴 바에는 집에 있을 때처럼 심심한 것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사람 살려!


소리가 나는 곳에는 늪에 빠진 사냥꾼이 도움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신부는 그를 꺼내주기 위한 도구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핍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사냥꾼이 외칩니다.

당신에겐 기다란 노가 있잖소!


그 말에 신부의 눈이 뻔쩍 뜨입니다. 사냥꾼을 구해준 신부의 머릿속에서는 재미있는 생각들이 마구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과일을 노로 땁니다. 숲에서 채취한 다양한 재료들을 커다란 항아리에 넣고 노로 저어가며 요리를 만듭니다. 때론 노를 무기 삼아 곰과 격투를 하기도 합니다.

숲의 놀이를 마친 신부는 마을로 내려와 야구 경기에 참여합니다. 붉은 헬멧을 쓰고 야구 배트 대신 기다란 노를 양손으로 움켜잡고 자세를 취합니다. 경기가 벌어지는 들판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신부가 노를 휘두릅니다.


타-악!


초록 들판 위로 붉게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가르며 거칠고도 힘차게 뻗어나갑니다. 저는 이 장면이 너무 좋습니다. 자신감 있는 신부의 타격 자세도 좋고, 화면을 뚫고 뻗어나가려는, 이렇게 멋진 노란색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신부의 야구 실력은 전 세계로 퍼졌고 유명 야구팀의 감독들이 스카우트를 제안했습니다. 신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추운 지방의 야구팀과 계약을 했습니다. 눈이 내리는 세계를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집을 나설 때도 들판에 바람이 불었는데 새 야구팀과 계약을 할 때도 바람이 불어옵니다. 석양빛이 신부의 하얀 드레스를 노랗게 물들입니다.

신부는 드디어 섬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한 손에는 신부의 든든한 동반자이자 강력한 무기인 노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여행 가방을 들었습니다. 배를 타고 힘겹게 노를 저어 나아가야 하는 바다가 아닌 신부만을 위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가로질러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출발합니다.

하늘을 덮고 있던 검은 기운이 불어오는 바람에 점점 흩어지며 드러난 하늘길로 신부를 태운 비행기가 유유히 날아갑니다.


※ 매주 목요일에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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