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번거롭지만 맛은 최고인
어렸을 때 급식에서 나온 육개장을 맛있게 먹고 집에 와서 엄마에게 해달라고 하니까 엄마가 단박에 이렇게 말했다. "너희 아빠가 싫어해서 못 해."
그렇다. 아빠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담백한 음식을 즐기는 사람이다. 국은 맑은 국을 좋아하고 고기도 양념보다는 생고기를 좋아하고 생선 요리 등도 담백하게 즐기는 사람이었다. 찌개 아닌 다음에는 고춧가루 넣는 음식을 싫어했다. 그런 아빠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서 엄마는 늘 양념을 적게하는 음식들을 하곤 했다. 엄마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굳이 빨간 국물을 집에서 할 필요 있니. 뭐 그건 아무데서나 먹을 수 있잖아."
엄마가 바쁜 와중에 한 말이라서 별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또 나는 그 의미를 굳이 물어보지 않고 나 스스로 판단했다. '아 빨간 음식들은 쉬운 것이로구나. 별로 공이 들어가지 않는가보다.'
커서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 전제는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음식 재료의 맛을 살리는 요리법이 사실 더 어렵긴 하지만 고춧가루가 들어가는 요리라고 쉽게 맛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빨간 국물 요리의 경우 어릴 때는 뭣 모르고 그저 고춧가루만 들어가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절대 아니었다. 수십 수백가지의 요리법이 있고 작정하고 해장국 같은 것을 얼큰하게 내자면 끓이는 시간이 엄청나게 걸렸다. 그래서 굳이 요리법을 알아도 잘 하지는 않게 되었다.
게다가 나의 입맛 자체도 아빠의 영향인지 사실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간 매운 음식을 즐기진 않는다. 또한 양념국 보다는 맑은 국 (소고기 무국, 미역국 등) 을 더 즐긴다. 게다가 우리 집에는 5살 아이가 있으니 굳이 나 먹자고 빨간국을 억지로 끓이진 않는다. 편식이 좀 있는 남편은 국 자체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때때로 빨간 음식이나 매운 음식 등이 땡기긴 한다. 또 여름에는 고기를 많이 넣어 국물을 낸 몸보신하는 음식등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이 때 가장 좋은 것이 소고기 육개장이다. 보신한다고 매년 먹는 삼계탕이 약간 질린 것도 있고... 가끔은 이런 빨간 국물이 땡길 때가 분명 있다. 이제는 내가 우리 가족 부엌 담당이기 때문에 내가 만들어서 내가 먹으면 된다. 괜히 남편에게 보신 음식으로 만들어준다는 핑계로 내가 며칠전부터 먹고 싶었던 얼큰한 국물을 끓여보았다.
육개장을 한번 끓이려면 갖은 채소를 준비해야 하고 고기도 육수내어 찢어야 하고 사실 손이 많이 가긴 한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일하면서 틈틈히 재료 익히고 육수내고 고기 찢고 하면서 시간을 많이 잡고 육개장을 끓이곤 한다. 오늘도 전부 다 끓이는데 한 4시간은 잡았던 것 같다. 사실 팔팔 끓이는 국이 아니라 뭉근하게 육수내어 끓이면 되는 것이라서 시간이 오래라고 어려울 건 없었다.
일단 양념을 제외하고 국에 들어가는 재료 중 중요한 것은 소고기, 고사리, 숙주, 버섯, 대파 정도라고 하겠다. 나는 육개장에 무조건 고사리가 들어가야 맛이 난다고 믿는 사람이라 고사리는 꼭 넣는다. 숙주는 고사리 만큼은 아니어도 중요한 재료고 느타리나 표고는 씹는 맛이나 향을 살려주기에 웬만해선 꼭 넣는 편이다. 말린 고사리가 있다면 좋지만, 나도 내 일이 있고 부엌에만 있는 사람이 아닌지라 그런 고급 재료들을 다 준비해놓고 할 순 없어서 이마트에서 데친 고사리를 사다 쓴다.
고기는 집 앞 정육점이 저렴하고 고기 질도 괜찮아서 아롱사태와 양지를 반씩 가져왔다. 저걸 다 육개장에 넣은 건 아니고 한 2/3 정도 넣었고 나머지는 아이가 먹을 장조림을 하기로 했다.
고기는 핏물을 적당히 뺀 후에 (난 많이 빼는 편은 아니다.) 한시간 정도 푹 끓여 육수 내고 익혀진 고기는 쪽쪽 찢어서 국에 넣으면 된다. 고사리는 데친 것을 준비했으니 상관 없고 숙주 살짝 데치고 느타리도 살짝 데쳐서 먹기 좋게 찢고 잘라 양념거리를 준비해 놓는다. 표고도 쫑쫑 짤라서 약간 넣는다. 표고 버섯 기본 향이 강해서 많이 넣지는 않고 한 2-3개 정도?
육수는 따로 놓고 국간장과 고춧가루 적당량으로 고기와 고사리 숙주 버섯에 양념을 한다. 국간장은 한 5큰술 정도 넣고 고춧가루도 한 5-6큰술 정도는 넣은 것 같다. 이것으로 최종 간을 할 것은 아니기에 정확하게 하진 않았다.
누구는 고추기름도 직접 내서 쓴다는데 나는 그렇게 할 여력 없고 오뚜기 고추기름을 한 3큰술 정도 넣고 생강과 마늘 적당량 넣어서 대충 볶아 쓴다. 고추기름도 한번 더 볶으면 더 좋은 맛이 난다. 마늘과 볶으면 더할 나위 없고.
그 고추기름에 양념한 재료들을 넣어서 휘휘 저으면서 볶듯이 다시 익히고, 대파는 마지막에 넣는 사람들도 있던데 나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 별도의 양념을 하지 않은 채로 이 쯤해서 넣는 방법을 주로 쓰곤 한다. 파가 덜 익으면 아린 맛이 나고 나는 파의 식감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우러나게 조리하는 편이다.
미리 고기를 끓이면서 깊게 우러냈던 소고기 육수를 재료에 부어서 이제 끓이기만 하면 된다. 중불 정도에서 푸우욱 우리듯이 끓이면 깊은 맛의 육개장이 완성된다. 기존 간이 부족하다 싶으면 국간장을 조금 더 넣고, 국간장을 조금 더 넣어도 부족하다 싶은 것은 굵은 소금을 두큰술 정도 넣어서 싱겁지 않게 간했다. 나는 음식이 짜면 짜지 싱거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맛이 잘 느껴지게 간을 넉넉히 했다.
자 그럼 재료가 넉넉히 들어간 얼큰하고 감칠맛 나는 육개장이 완성되었다. 나는 대충 반찬 차려놓고 점심을 저 국으로 떼워버렸다. 이따 남편이 저녁 시간에 맞게 오면 한그릇 주고, 수호는 아직 먹기에는 너무 어리기 때문에 줄 수 없고 내일 엄마가 오면 조금 줄 수도 있겠고 요새 알게 된 이웃에게 나눠줄까도 생각중이다.
육개장은 공이 많이 가는 국물음식인지라 나눠주면 다들 고마워하지,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매운 걸 못먹는 사람을 뺀다면? 내 손이 원체 크기도 하지만 육개장 같은 경우에는 기본 재료 자체가 많아서 적은 양의 국을 끓일 순 없다. 여기 저기 나눠줄 좋은 핑계가 생겼네.
부엌에 한 솥 있는 육개장을 아이 유치원 오기 전에 소분해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