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16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 457일째
안녕하세요 00수학학원 고등부 강사 안대현입니다.
안녕하세요. 스타트업 0000의 안대현 이사입니다.
안녕하세요. it스타트업 전문 서치펌 00의 안대현 헤드헌터 입니다.
안녕하세요. AI 교육 플랫폼 000 사업기획팀 안대현 팀장입니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하면서 나에게는 항상 직함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마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 뒤에는 항상, 내 이름보다 그 직함과 직함을 부여 해준 소속이 먼저 튀어나와야 했다. 인사를 할 때마다 나는 속주머니를 뒤적거리거나 지갑을 꺼내어 명함을 찾았다. 내 명함을 건네받은 이들이 본인 손 위의 작고 네모난 종이를 훑어본다.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내 이름 석 자가 아니라, 내 이름 양옆 그리고 위아래에 붙어있는 소속과 직함, 직무, 그리고 직책이었다. 안 선생님, 안 이사님, 안 매니저님, 안 팀장님. 그들이 부르는 것은 내 이름이 아니라 사회에서 내게 만들어 준 타이틀이었다.
30대 중반에 무직, 그리고 백수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난생처음 명함 없이 살고 있다. 퇴사 직후마다 일하던 곳에서 찍어준 명함 백여 장을 그대로 분리수거 통에 게워 냈다. 분명 나는 그것들을 모조리 버렸는데, 이제 내 이름 위아래 그리고 양 옆엔 어떤 수식어도 붙어 있지 않은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과거의 나를 찾는 연락들이 간헐적으로 찾아온다. 학생, 학부모, 거래처 사장님, 이직을 도와달라는 사람들, 내 업무를 인계받은 직장 동료. 그들 각자의 호주머니와 전화기에는 각기 다른 내가 저장되어 있을 터였다.
그럴 때마다 그들에게 전달하는 비슷한 문장들.
"죄송하지만, 제가 퇴사를 해서요. 담당자 번호 알려드릴게요."
그제야 그들도 나처럼 나의 연락처를 지우고, 지니고 있던 명함도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다. 내 옆에 짝 달라붙어 있던 직함과 소속만이 아니라, 내 이름까지 통째로 그들의 기억과 관심에서 사라지는 순간이다.
나도 내 전화기에 저장된 사람들의 연락처를 지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 'ㄱ'부터 'ㅎ', 그리고 그 외에 알파벳과 특수 문자 모두를 훑어서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이름과 번호를 지운다. 누구인지도 기억이 안 나는 번호는 순식간에 지운다. 이름은 기억나지만, 그와 어떤 일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 잠깐동안 과거를 훑다가 지우기도 한다. 지우기를 주저하는 이름도 몇몇 보인다. 과거를 격렬히 부대껴 온 이들이다. 머릿속 먼지 낀 필름이 영사기를 통해 희미하고 투박하게 빛난다. 이내 필름의 끝에 다다라서 나는 그들을 지운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내 이름만이 남는다.
오로지 내 이름만으로 닦아가야 할 길이 꽤 녹록치 않음을 현재 격하가 느끼지만, 이미 그 전부터 내 등골에 서늘하게 맺혀있는 조급함과 두려움은 지금의 느낌을 시도 때도 없이 예고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단골 카페로 가서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저녁에 있을 북토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카페 사장님의 소개로 낯선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북토크에서 소개될 책의 출판사 사장님이었다.
그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00출판사의 000대표입니다."
나는 답했다.
"안녕하세요. 안대현이라고 합니다."
그의 인사말에는 자연스럽게 그가 무얼 하는지, 어디의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에 반해 나는 그 어떤 수식어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에게 필요한 건 내 이름 뿐이었다. 북토크가 끝나고 스무 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은 각자의 몸 안에서 명함을 꺼내 자신을 소개했다. 상대방의 소개를 듣고 각자의 명함을 주고받았다. 나는 멀찍이서 그들의 풍경을 바라봤다. 이상했다. 업무상의 목적이 아님에도 자신의 명함을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는 모습. 사뭇 나에게는 이계였다.
나에게 있어서 명함은 족쇄였다. 명함을 버리고, 전화기의 연락처를 삭제하는 일은, 나에게 있어서 자유를 표방하며 자유와 나란히 걷고자 하는 나의 의지가 담긴 트리거 중 하나였다. 사회가 정해준 수식어에서 벗어나 명함 없이 살아가는 삶이, 내가 바라는 자유로운 삶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명함에 가려진 나의 모습을 가리고 누군가가 정해준 시스템에 맞춰 살았던 과거의 나에게, 명함은 자괴감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명함이 존재했다. 단지 몇백 장이 종이로 찍어낸 것이 아니었을 뿐.
30대 백수에게도 명함은 필요하다. 지금처럼 백수의 삶을 살든, 앞으로 내가 어떤 형태로 내 밥벌이를 하든, 사회라는 집군 안에서 살아가는 이상 나를 나타내는 수식어가 붙을 수밖에 없음을 저항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이제부터 만들어낼 명함과 내가 여태껏 품에 지닌 명함 사이의 온도 차가 있을 뿐이다. 누군가가 지정해 준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호흡하는 명함이 아닌, 온전히 내 이름 세글자 정자 안에서 두텁고 따듯하게 쌓아갈 명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