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26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 466일 차
"나 이런 사람 혐오하는 거 같아 ㅋㅋㅋㅋ"
삼십 년을 좀 더 살아오면서 갖은 욕이란 욕은 꽤 배부르게 들어본 것 같다. 사내 친구 놈들과 시시콜콜한 잡담을 할 때나, 진심을 담아 말싸움을 할 때나, 회사 정치판에 들어와 있을 때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이 오갔던 과거는 일상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욕을 한다.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은 의례 있는 일이다. 단어 자체가 비속어이기도 하고, 비속어는 아닐지라도 상대방을 힐난하기 위해 튀어나오는 억센 억양과 거칠고 큰 목소리 또한 욕이라고 봐야 한다. 상대에게 하는 욕의 목적은 명확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키고, 눈앞에 놓인 상대를 위압하는 것이 일반적이리라. 이 모든 것은 대부분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동한다는 치졸한 명분 아래 충동적으로 일어난다. 욕은 일상이다. 누구의 입에서나 욕은 나오기 마련이다. 자신이 어떤 신분이든, 어떤 일을 하든, 평소에 성격이 어떻든, 어떤 환경에서 나고 자랐든, 욕은 일상이다. 다만, 상대적인 뿐.
'혐오스러운 사람'이라는 말이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내뱉어지는 일은 일상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혐오'는 욕이 아니다. '싫어하고 미워한다'라는 떳떳한 의미가 사전에 적힌 표준어다. 하지만 내가 일생동안 들어온 그 어떤 욕보다도 강렬했다.
"누군가를 혐오해 본 적이 있나요?"
독서모임에서 지극히 평범한 질문이 내 입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모임원들은 각자가 혐오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너무도 조심스러웠다. 혐오의 수준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 저마다의 주관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꽤 분노를 끌어올릴 일이, 누군가에게는 상대적으로 잔잔한 일상일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는 혐오의 대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가지고 말을 이어 갔다. 혐오스러운 경험을 혐오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도록, 그저 듣는 이들이 자신의 상황을 각자의 수준에 맞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있는 사실만을 말하려 하는 노력이었다.
모임 자리에는 작가가 있었다. 에세이 몇 편을 쓰고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작가는 내가 꺼낸 질문에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혐오'라는 단어가 너무 우리 사회에서 쉽게 쓰이는 것 같다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의견을 스스럼없이 꺼냈다. 어떤 잣대에 혐오라는 척도를 갖다 대어야 하는지, 왜 우리는 이 단어를 이렇게도 평범한 일상에 쉬이 꺼내게 되었는지, 마치 자기 자신에게 얘기하는 듯했지만, 이런 작가의 생각은 모임원들에게는 내놓는 은유적인 질문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세심하다고 생각하나요?"
몇 분 후 작가의 발제가 시작되었다.
"저는 너무 과하게 세심할 때가 있어요. 소심한 건지 세심한 건지... 누군가가 나와의 감정적 교감이 무거울 때, 저는 한참 동안 고민해요. 그와 나눈 카톡을 보며 고심한다거나, 방에 홀로 누워 상황을 한 번 깊이 곱씹는다거나..."
나의 세심함에 대해 조심스럽지만 무겁지만은 않게 몇 문장을 꺼내는 와중에, 나는 내 맞은편에 있던 작가의 몸짓을 곁눈질로 느꼈다. 머리를 뒤로 젖히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분위기의 웃음을 입가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 나 이런 사람 혐오하는 것 같아 ㅋㅋㅋㅋ"
작가는 아까 내가 물었던 질문에 이제야 답을 했고, 그 답은 꺾임 없이 내 귀에 박혔다. 아무래도 나는 세심한 사람이 맞나 보다. 작가의 찰나의 웃음에서 작가의 '이해 불가' 의중을 알아챘으니. 깔깔대는 웃음에서 충분히 나의 행동을 진심으로 혐오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그저 웃었다. 아무 일 아닌 듯, 그저 농담조로 내뱉은 한 마디일 뿐이라는 듯. 그저 웃었다. 목젖에서 대기 중이던 불쾌함을 내 앞에 놓인 얼음물로 겨우 삼켜냈다. 내 행동으로 모임의 분위기가 침체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다행히도 나의 불쾌를 한 끝 차이로 이겼다.
아무리 솔직함이 대세인 요즘 세상이라지만, 면전에서 욕보다 더 치욕스러운 표준어를 듣는 게 마냥 통용되어야 할 세상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솔직함이 아니라 무례함이었다. 나는 무례함을 고스란히 삼켰다. 그 무례함이 모임 내내 역했다. 다시는 작가의 눈을 보기 어려웠다. 다행히도 모임의 끝자락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망정이지, 나는 곧바로 화장실로 가서 내가 삼킨 무례함을 토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욕이 나았을 일이다. 욕은 욕한 이를 욕해도 된다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혐오스러운 사람'이라니, 욕이 아닌 것에 욕을 할 권리는 없었다. 작가가 생각하는 주관적 혐오의 기준은 이로서 정해졌다. 혐오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쓰는 이 세상을 비판하기 전에 작가는 작가의 입을 먼저 혐오했어야 했다. 솔직함을 빙자한 무례함을 경계해야 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소심한 것인지 세심한 것인지 모를 행동을 한다. 상황을 상기한다. 아니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피어 나왔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누군가를 혐오해 봤나요?"라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혐오의 기준을 논하던 작가의 행동. 자기 폭로하듯 내뱉은 나의 자기 고백에 혐오스럽다는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작가의 행동. 아무리 생각해도 솔직함이 아니라 무례함이다.
더 이상 내가 삼킨 무례함이 혐오로 바뀌지 않도록, 꾸역꾸역 소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