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그 책은 비 내리던 저녁, 도시가 뒤집힌 우산처럼 검고 젖어 있던 날에 나를 찾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현관 앞 작은 게시판 위에 반투명 표지를 씌운 얇은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낡지도 새것도 아닌, 막 상상 속에서 꺼낸 듯한 모양이었다.
첫 장에는 이름이 없었다. 다만 바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말하지 못한 것을 모두 모아라.”
나는 손가락으로 글자를 더듬었다. 그러자 종이 사이에서 소리가 났다. 바람도, 빗소리도 아닌… 목소리. 아주 낮고 조심스럽게, 옆방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속삭임.
“엄마.”
나는 황급히 책을 덮었다. 오래 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단어가 목구멍에 걸려 어린 시절 생선가시처럼 남아 있는 듯했다.
집에 와 다시 책을 펼쳤을 때, 이번에는 수많은 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안해.”
“보고 싶어.”
“가지 마.”
“곁에 있어 줘.”
모두 다른 색깔, 다른 크기의 목소리였다. 나는 깨달았다. 이것은 내 목소리였다. 내가 끝내 말하지 못한 모든 말들.
마지막 장에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한 달. 매일 하나의 목소리.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진다.”
단 한 달. 삼십 날은 난간 없는 계단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책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불을 끈 채 오래도록 빗소리를 들었다.
잠이 들자, 목소리들이 새가 되어 내 손등에 앉는 꿈을 꾸었다. 작고 가벼운 날갯짓, 따뜻한 손길만이 붙잡을 수 있는 존재. 눈을 뜨자마자 알았다. 이건 손으로만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 말이 필요했다.
나는 시계를 맞추고 첫 장을 열었다. 오늘의 문장은 짧았다.
“그녀에게 말해.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