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둘째 날 — 가족의 목소리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하늘은 특별히 맑지도 흐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은 묘하게 불안정했다. 책을 다시 펼치기 전부터 이미 알 것 같았다. 오늘은 나를 가장 깊이 흔들 목소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책장을 넘기자, 두 번째 문장이 나타났다.
“엄마에게 말해. 늦었지만, 나는 여기에 있다고.”
짧은 글귀였지만,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손끝이 떨리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오랫동안 외면해 온 단어가 이제 내 앞에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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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꽃집에 들러 흰 카네이션을 샀다. 카네이션은 모양이 단순했지만 향기는 오래 남았다. 꽃말이 효도와 감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말조차 엄마에게 직접 전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버스를 타고 오래된 동네로 향하는 동안, 창밖 풍경이 과거와 겹쳐졌다. 골목길 벽돌 하나, 낡은 간판 하나에도 어린 시절의 기억이 묻어 있었다. 나는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버스가 멈출 때마다 작은 심장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도착한 곳은 내가 자라난 집. 이미 낯선 사람의 것이 된 지 오래지만, 그 집 앞에 서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대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결국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낯선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왔다.
“누구 찾으세요?”
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옛날에 여기 살던 사람이에요. 어머니와 함께.”
할머니는 놀란 듯 나를 바라보다가, 금세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동네 사람들이 얘기해 주었어요. 이 집에서 아이가 자랐다고.”
그녀의 허락을 받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발밑의 흙, 한쪽 구석의 오래된 감나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흰 카네이션을 그 나무 밑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엄마, 나 여기에 있어요. 늦었지만… 이제야 말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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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기억이 밀려왔다. 여름밤, 엄마가 감나무 아래에 앉아 나에게 동화를 읽어 주던 모습. 겨울 새벽,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을 내어놓으며 내 등을 두드리던 따뜻한 손길. 하지만 가장 선명한 것은 병실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차갑고 하얀 불빛 아래,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떠나버린 엄마의 손.
나는 평생 그 순간을 피해 다녔다. 말하지 못한 한마디가 나를 죄인처럼 만들었고, 그 죄책감이 오늘까지 나를 따라왔다. 하지만 지금, 이 낡은 마당에서 나는 비로소 속삭일 수 있었다.
“괜찮아, 엄마. 그리고…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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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서 있던 할머니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당신 어머니는 참 좋은 분이었나 봐요. 동네 사람들이 아직도 기억하더군요. 늘 사람들을 챙기셨다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던 엄마와, 이웃들이 기억하는 엄마는 조금 달랐다. 나는 늘 바쁘고 엄격한 얼굴을 떠올렸지만, 다른 이들에게 엄마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나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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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은 부모에게서 태어나지만, 부모를 온전히 알지는 못한다. 우리가 보는 얼굴은 단편일 뿐이고, 그들의 삶은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래서 남겨진 말들은 늘 후회로 남는다. 하지만 후회 속에서도, 말해 보지 못한 사랑은 여전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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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어 책을 덮자, 두 번째 문장은 서서히 희미해졌다. 종이는 어제보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에게 말해. 그때 널 혼자 두어서 미안했다고.”
나는 책을 천천히 덮었다. 내일, 어떤 목소리가 나를 기다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목소리 또한 오래된 나의 상처일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