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소리

셋째 날 — 친구의 목소리 -

by 나리솔


셋째 날 — 친구의 목소리



책을 펼쳤을 때, 세 번째 문장은 마치 오래된 편지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에게 말해. 그때 널 혼자 두어서 미안했다고.”


나는 한동안 그 문장을 응시하며 숨을 고르지 못했다. 오래전 묻어둔 장면이 천천히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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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 명이었다. 나, 준호, 그리고 태민.

고등학교 시절, 셋은 떨어질 수 없는 그림자처럼 함께 다녔다. 밤늦게까지 PC방에 앉아 게임을 하고, 서로의 집에 얹혀 살며 시험공부를 했다.

그러나 어느 겨울, 준호가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집안이 무너지고 있었다는 걸.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집에선 늘 싸움이 일어났고, 준호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괜찮아지겠지”라는 말로 스스로를 달래며,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건, 학교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던 그의 뒷모습이었다.

그날, 나는 다가가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나눈 마지막 장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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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흘렀고, 그 기억도 조금씩 옅어지는 듯했지만, 책은 나를 다시 끌어올렸다.

나는 핸드폰을 뒤져 오래된 연락처를 찾아냈다. ‘준호 — 수학노트 빌려준 놈’. 이름 옆에 붙은 농담 같은 메모가 아직 남아 있었다.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메시지를 남겼다.

“준호야, 나야. 혹시 괜찮으면 오늘 저녁에 만나자. 미뤄온 말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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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오래된 포장마차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좁은 골목, 국물 냄새와 소주 잔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인 곳.

잠시 후, 낯익지만 달라진 얼굴이 나타났다.

준호였다.


머리에는 흰머리가 섞였고, 눈가엔 깊은 주름이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오랜만이다.”

그는 짧게 인사하며 내 옆에 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술잔만 채우며 말이 없었다. 차마 꺼내지 못한 문장이 목구멍에서 뭉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준호야, 그때… 미안하다. 너 혼자 힘들 때, 나는 옆에 있어 주지 못했어.”


준호는 술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말을 듣는 데, 이십 년이 걸렸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안에 담긴 무게가 분명했다.

“난 네가 왜 오지 않았는지 수없이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는 알아. 너도 어린 애였고, 두려웠겠지. 그래도… 네가 오늘 이 말 해줘서 고맙다.”


나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늦었지만, 그 말만은 꼭 하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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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참 동안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등학교 체육대회, 몰래 갔던 노래방, 첫사랑의 이름.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다시 십대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대화가 끝날 무렵, 준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다 떠나. 결국 남는 건 몇 개의 기억뿐이야. 근데 그 기억 속에서 네가 나를 찾아와 준 게… 난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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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골목길의 불빛을 오래 바라보았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홀로 두고, 또 홀로 남는다. 중요한 건 그 고독을 인정하고, 다시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일 것이다.


책을 덮자, 세 번째 문장은 희미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목소리가 속삭였다.


“너 자신에게 말해. 네가 아직 살아 있다고.”


나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친구의 목소리를 되찾았다.

내일은… 어떤 목소리가 날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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