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빵에 발라 먹을 수 없는 것

글쓰기 - 사람이야기

by 나리솔


말은 빵에 발라 먹을 수 없는 것


어느 겨울, 삭풍이 온몸을 휘감던 낡은 도시의 뒷골목. 그곳에는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앉은 허름한 연립주택이 서 있었다. 흡사 거대한 누더기를 걸친 노인처럼, 삐걱거리는 문과 금이 간 벽돌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고단함을 대변하는 듯했다. 마치 세상을 향해 헐벗은 맨살을 드러낸 채, 비바람을 견디는 것 같은.

그곳으로 오늘의 주인공, 설비공 재호 씨가 들어섰다. 낡은 파이프들을 교체하는 작업 때문이었다. 이미 건물 전체의 뼈대가 삐걱거리는 통에, 차라리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나을 법한 삭아빠진 집이었다. 찌든 때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공기는 그의 폐부를 찌르고, 여기저기 새는 물은 쉰내가 났다. 말 그대로 썩어 문드러진, 뼈만 앙상한 노인 같은 집.

오늘 따라 유독 힘든 작업이었다. 수도관을 바꾸고 밸브를 고정하고, 녹슨 배관들을 뜯어내는 일은 허리를 펼 틈도 없이 이어졌다. 허리 한 번 펴면 삐그덕거리는 관절마다 신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재호 씨는 목장갑 낀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속으로 되뇌었다. '하, 이것 참…'

오랜 작업에 온몸이 쑤시고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요란했다. 그는 잠시 작업을 멈추고 낡고 지저분한 부엌으로 향했다. 벽에 걸린 찢어진 달력은 흐릿하게 겨울의 한복판을 가리키고 있었다. 삐그덕거리는 녹슨 싱크대 위, 땀 냄새 밴 공구들을 한쪽으로 밀어두고 휴대용 버너에 물을 올렸다. 이어서 그는 찌그러진 스테인리스 컵과 비닐봉투에 정성껏 싸둔 샌드위치를 꺼냈다. 두툼한 식빵 사이에 큼지막하게 썰린 소시지가 두 조각씩이나 들어 있는, 투박하지만 든든한 점심이었다.

"쉬지도 못하고 일하니, 이거라도 먹어야지." 재호 씨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지만, 샌드위치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작은 기대로 빛났다. 짭조름한 소시지 맛과 부드러운 빵의 조화가 그의 거친 하루에 유일한 위로가 되어주곤 했다.

그 순간, 부엌 문가에 조그마한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네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늘어진 낡은 면 티셔츠와 여기저기 구멍 난 스타킹을 신은 채였다. 스타킹은 걷다가 벗겨졌는지 길게 축 늘어져 바닥에 끌렸다. 아이의 눈은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작은 들짐승처럼 재호 씨의 손에 들린 샌드위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작은 눈망울 속에는 배고픔과 간절함이 가득했지만, 감히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순진한 기다림이 서려 있었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에서 눈을 뗄 수 없을 뿐이었다.

재호 씨는 저도 모르게 샌드위치를 베어 물려던 손을 멈췄다. 아이의 눈빛, 그 깊고 아픈 시선이 그의 심장을 쿵 하고 내려앉게 했다. 순간, 어린 시절 자신의 굶주렸던 기억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는 입가에 어설픈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굳어진 얼굴 근육 때문에 그의 미소는 왠지 모르게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웠지만, 그 진심만큼은 아이에게 닿았으리라. 그는 베어 물지 않은 샌드위치를 아이에게 내밀었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먹어, 어서 먹어.’

아이는 한참을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가느다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샌드위치를 받아들었다. 그 작은 손에 들린 샌드위치는 마치 보물처럼 소중해 보였다. 민준이는 곧장 샌드위치를 입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대신 돌아서서 몸을 숨기듯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에서 샌드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직감한 재호 씨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부엌 문가에 흐릿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해쓱한 얼굴에 빛바랜 면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인이었다. 병색이 완연한 그녀는 재호 씨에게 작은 목례를 했다. 여윈 몸매와 불안하게 떨리는 눈빛은 그녀가 견뎌내는 고통의 무게를 짐작하게 했다. 재호 씨는 민준이의 엄마인 은영 씨임을 직감했다.

민준이가 은영 씨의 품에 안기며 샌드위치를 엄마에게 내밀었다. 아이는 배고픔보다 더 깊은 사랑으로 엄마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보다, 병든 엄마가 먹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은영 씨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소리 없는 눈물은 그 어떤 말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굶주림에 대한 슬픔, 자식에게 미안함, 그리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통함, 하지만 낯선 이의 따뜻한 손길에 대한 깊은 고마움까지… 모든 감정들이 응축된 눈물이었다. 그 눈물은 아이에게 받은 사랑에 대한 화답이자, 재호 씨의 작은 호의에 대한 무언의 감사였다.

재호 씨는 차마 그 모습을 더 볼 수가 없었다. 다시 녹슨 배관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망치를 들었다. 텅 비어버린 뱃속에서 허기가 요동쳤지만, 그의 마음은 묘한 온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는 우직하게 망치질을 하고, 드릴로 굉음을 울리며 작업을 마쳤다.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침묵 속에서 더욱 선명한 교감이 오갔음을 그는 알 수 있었다.

모든 작업이 끝났다. 녹슨 냄새 대신 새로운 수도관의 희미한 쇠 냄새가 났다. 재호 씨가 공구 가방을 챙겨 복도로 나서자, 은영 씨가 조용히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빛이 서려 있었다.

재호 씨는 순간 쭈뼛거렸다. 문득 한 부잣집에서 받은 팁 삼만 원이 떠올랐다. 원래는 오늘 고된 하루를 마치고 시원한 막걸리 한잔 할 생각으로 고이 접어둔 지폐였다. 잠시 망설였지만,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리고는 파란색 오만 원권 지폐를 은영 씨의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어주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고하세요…" 은영 씨의 작은 목소리가 그의 뒤를 쫓았다. 재호 씨는 그 말을 뒤로하고 무거운 공구들을 달그락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등 뒤로 은영 씨의 닫히는 문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텅 빈 뱃속만큼은 아닌 듯했다. 가슴 속에서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사람에게는 말이 필요하다. 유려한 언변은 분명 때로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되기도 하고, 고등 교육과 세련된 매너 또한 삶을 살아가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된다. 하지만 가끔은, 평범하고 순수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모든 것이 필요 없을 때도 있다. 그들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알아듣고, 가슴으로 전해지는 온기를 이해한다. 굳이 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자신의 가장 귀한 한 조각을 기꺼이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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