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오래 살다가는 벙어리 되겠네>
"익스 큐~즈미~. 바이 리 패션 프룻 주스 떡까 테이크 어웨이 플리~즈."
이 말이 무슨 뜻 인지 아는 사람?
이 말은 바로 '패션 프룻 주스 7잔 모두 가져가게 포장해 주세요'라는 얘기다.
물론 말도 안 되게 영어와 베트남어를 막 섞어 놓은 것이지만 여기 사람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을뿐더러 가끔은 친절한 미로소 "네"라고 우리말로 대답을 한다. 그리고 갈 때는 "안녕.. 하.. 시요" 라며 인사한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 일단 적어도 나한텐 다행인 상황이다.
처음에 여기 왔을 때 성조가 6개인데 그에 따라 뜻도 다 다르고 발음도 영어식 발음 기호와 달라서 과연 내가 이 나라 말을 배울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내 마음은 '여기 살러 왔으니 힘들어도 배워야 하지 않겠니?' 하는데 머리라는 녀석은 원래 포기가 빠른 애라 '됐다! 포기해라.' 한다. 그래서 나는 머리의 의견을 따르기로 딱! 마음을 먹어버렸다.
그런데 기현상이 일어났다.
나는 분명 베트남에 살건만 이상하게 영어가 늘고 있었다. 베트남어를 몰라서 영어만 쓰다 보니 일어난 현상이었다. 분명 몰랐던 단어인데 그냥 신기하게 나오는 게 아닌가. 원래 영어를 못 하는 편은 아니었다. 대학원 다닐 때 고등학생들 영어 과외도 했었고, 직장 생활할 때도 외국인들과 만나도 불편함은 크게 없었다. 여기 와서도 엄마들 학교 상담할 때 통역을 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 와서 4개월 동안은 영어가 더욱, 정말 거짓말 좀 보태서 눈 뜨면 늘고, 눈 감아도 늘었다.
하.... 이게 학생 때 그랬어야 우리 엄마가 좋아하셨을 텐데...
그리고 6개월 차...
점점 주변 한국 언니들과 친구들이 쓰는 베트남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단어들이라고 해야겠다.
1,2,3,4... 숫자부터, 정말 기본적인 생존용 단어들, 그리고 제일 빨리 배운건 역시 음식점에서 쓸 수 있는 단어들이었다.
남편과 시 사촌 도련님과 1군에 있는 '나향응온' 이라는 베트남 음식점에 갔는데 내가 "못 까이 반쎄오, 못 까이 미 싸오, 못 까이 껌승, 못 까이 분짜, 바 리 짜다." 여기에 화룡점정 "콤 쓰욤 칵란" 했더니 물개박수를 치며 베트남어 되게 잘한다고 난리다. 내가 한 말의 뜻은 '못 까이-한 개' 나머지는 음식 이름이고 냉차 세 잔을 주문한 것이다. 그리고 화룡점정은 '물티슈는 쓰지 않아요.'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자면 어떤 대화체도 아니고 그냥 '고등어 하나, 김치찌개 하나' 이런 식이다.
그리고 한 달 뒤 시댁 형님이 여행 오셨는데 택시 기사님이 자꾸 나에게 말을 거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딱 한 마디 했다. "콤 히유" (잘 몰라요-못 알아들어요 라는 뜻) 그랬더니 형님이 그새 베트남어를 배웠나며 감탄을 한다. 그래서 자존심에 말할까 말까 하다 뜻을 알려드렸더니 박장대소를 터뜨리신다.
호치민 1군의 베트남 요리 전문점 '냐향응온'
음식이 다양하고 맛있다. 게다가 가격도 착하지만 실외로 터진 구조라 좀 덥다.
그래서 사람들의 감탄과 나를 향한 경이로운 눈빛에 힘입어 주워들은 몇 안 되는 단어들을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대화라고는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단어들만 던지는 식이다. 그래도 영어만 쓰는 것보다 더 잘 통해서 조사와 접속사만 영어를 붙여서 썼는데 신기하게도 이게 얼마나 잘 통하는지...
베트남어도, 영어도 아닌 신 언어를 창조하시어 5년을 쓰고 있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모두가 종종 그러고 있다.
한 번은 친한 친구와 친구의 차를 타고 1군에 가는데 기사님이 어디로 가야 하나 물으니 영국 유학도 다녀오고 대기업 출신인 내 친구가 엄청 차분하고 점잖은 말투로 "여기서 디탕(직진) 해서 렉스호텔 앞에서 웨오파이(우회전) 하고, 조금 더 디탕(직진) 해서 웨오짜이(좌회전) 해 주세요" 하길래 기사님이 한국말도 하시냐 물으니 지금 본인은 베트남어 한 거라고 해서 같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는 기사님을 배려해서 참 목소리와 말투도 차분하고 예뻤다. 단어만 던지는 말이지만 배려하는 마음에 따라 우리의 신 언어가 그리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생각이 든 시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의사소통이 계속되다 보니 나의 경우는 (다분히 핑계적 합리화) 이제 영어도, 베트남어도 정말 안 늘고 오히려 영어도 엉망이다.
게다가 이제는 한국어로 단어가 가끔 생각이 안 나서 한참 생각할 때가 있다. 아까도 큰 딸과 대화하다가 '깊이 오래 생각하다'라는 '고심'이 안 떠올라 한참을 생각했다. 이 정도면 그냥 바보인가 싶기도 하다.
참 통탄할 노릇이다. 나이 40에 어린 시절 그토록 이루고 싶던 작가라는 꿈을 이뤘는데 단어를 모르다니...
정말 친구들 말 대로 10년 차엔 우린 말 그대로 '0개 국어자' 되겠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책을 읽자! 부지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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