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20년도 넘게 산 같은 한국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야말로 이 동네는 내 필명처럼 정글. 즉 우거진 늪지대였다고 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그때는 이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인터넷도 안 되는 막막한 환경에 자전거를 끌고 시장을 보며 낯선 베트남 말을 토속인 베트남인들과 손짓, 발짓으로 알아듣고 표현하며 살았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 어느 시기,
대만의 어떤 기업이 이 우거진 정글 숲에 투자를 하여 개간을 하고 복이 넘치는 아름다운 곳이 되어라 하여 '푸미흥'이라 이름을 짓고 땅을 단단히 해나갔다고한다.
셀 수 없이 빽빽한 가구들이 옹기종기 모 여살 수 있는 아파트들을 듬성듬성 뻥, 뻥 지어 이곳은 미국의 LA와 같은 곳,
베트남의 한인촌이 되었다.
아파트 주변엔 상권이 구성되기 시작했고, 자전거를 타지 않아도 마트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 주어 걸어서 1-5분이면 신선한 채소, 과일, 고기를 살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병원도 담벼락 사이를 두고 크게 지어졌고 찻길만 건너면 한국 브랜드의 화장품, 의류 등이 미국, 유럽의 해외수입브랜드와 나란히 입점된 어마한 규모의 쇼핑몰도 이곳에 들어와 앉았다.
어쩌다 이곳이 한인촌이 되었는지는 모르나
1998년에 지어진 한국국제학교가 들어서면서부터 한국인들의 거주가 밀집된 건 아닐까 유추해 본다.
구성된 상권들이 살기 좋은 한인촌은,
베트남에서의 경제력이 중상위층인 베트남인들도 들어와 많이 거주하는 것 같다. 우리가 호구조사를 할 수는 없지만 건너 건너 소문에 이곳에 사는 베트남인들은 외국인노동자인 우리들보다 훨씬 부자이며 이 동네 아파트를 거주목적 외에도 두세 채씩을 투자목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생각이면 작고 무력해지지만,
그래도 같은 사람인데 돈이 있고 없고 가 뭐가 중요할 것이며, 그들 베트남인들 또한
한국인이라 하면 글로벌기업 삼성의 고향이라는 것과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리며 짜고 매운맛을 좋아하는 그들은 그저 이 하나로도 음식이 된다는 한국 고유의 김치를 굉장히 좋아하며 , 20년은 된 대장금이라는 드라마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드라마라 너도나도 이야기하고
BTS, blackpink 같은 말만 들어도 들어는 봤을 k-pop그룹을 자랑스레 이야기하니 대화의 주제가 많아서 호의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이 땅이 베트남이라는 나라의 땅이고 이 땅 위에서 정착하고 살아온 베트남인들과 베트남어로 시원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진입의 벽은 높았고 한 2년을 '씬짜오' 말고는 알아들을 수 없어서 나머지 말들은 웃음으로만 넘기다 어느 날 영어를 잘하는 베트남인 부부를 만나 어느 정도는 소통이 되기 시작했다.
수영이라는 운동종목으로 알게 된 우리는 쉴 타임에 대화를 시작했고 이름은 무엇. 나이는 얼마, 고향은 차로, 비행기로 몇 시간에서부터 서로 좋아하는 음식, 가장 맛있는 음식. 결국 음식과 술에 대한 이야기가 매일 주를 이루는 사이가 되었다.
나이가 많지만 그만큼 연륜이 있어 대화의 장을 열어준 한국인 언니와 배움의 열정이 커서 나보다 늦게 정착했지만 베트남어를 일찍 배워서 더 잘하는 한국인 동생과 영어로 베트남을 소개해주는 베트남인 언니가 만나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함께 식사를 했다.
베트남음식은 길거리에 널려있지만 한국음식은 한국인들이 아니면 몰라서 못 갈듯 싶어 우리 전통 술 막걸리와 전. 그리고 솥밥을 파는 식당으로 동행했다.
음식은 곁들일 뿐.
우리는 그곳에서 더 깊고 더 많은 대화를 하며 정을 쌓아갔다.
그리고도 커피숍을 갔고, 또 대화가 모자라 맥주를 사서 동네에서 해가 질 때까지 캔을 박았다.
우리가 어디서 나고 어디서 자랐는지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건 들을 귀와 담을 마음, 노래할 입으로 서로를 잇고자 노력하는 소통이 필요하다는 게 산다는 것 같다.
사람이 살면서 겪는 일들은 천편일률적이지 않겠나.
그 시기가 다를 뿐 생, 로. 병, 사는 피해 갈 수 없는 일인 거 아닐까.
이 큰 틀 안에서 우리는 가능하면 그 시공간들을 무수히도 빽빽한 행복으로 채우는 것이 좋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