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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아래 Nov 04. 2024

늙은 이유

당신의 깊은 주름은 마침내 아름다운 시가 되다

늙은 이유

             지은이 : 충남 보령 청라은행마을 무명 작가
                       (아마도 마을 어르신일 것으로 추정)

나이가 들면서 눈이 침침한 것은
필요 없는 작은 것은 보지 말고
필요한 큰 것만 보라는 것이며

이가 시린 것은
연한 음식만 먹고
소화불량 없게 하려 함이지요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은
필요 없는 작은 말은 듣지 말고
필요한 큰 말만 들으라는 것이지요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것은
매사에 조심하고 멀리 가지 말라는 것이지요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은
멀리 있어도 나이 든 사람을 알아보게 하기 위한
조물주의 배려입니다

정신이  깜빡거리는 것은
살아온 세월을 다 기억하지 말라는 것이고

지나온 세월을 다 기억하면
아마도
삥 돌아버릴 거래요
좋은 기억만 아름다운 추억만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을 보내기 싫어

절정에 이른 노란 은행을 보기 위해 보령 청라은행마을에 잠시 들렀다.

이미 길가까지 차가 빼곡한걸 보니 온 동네가 이방인들로 가득 차있다.


올해 은행은

긴긴 여름 유례없던 무더위 탓인지 그 색감이 예전만 못했다.

노랗게 물들었어야 할 은행잎들은 거무튀튀해

이 아름다운 자연의 색을 보기 위해 일 년을 기다린 내게 실망감을 전했다.


그냥 돌아오기 아쉬워

동네 한 바퀴 거닐다 신경섭 가옥에 이르러서야

기대했던 그 노란 은행잎과 조우했다.


노란 은행으로 가득한 고택이

가을의 운치를 더해줄 때 잠시 망중한을 느낀다.


지는 해 뒤로 하고

무거운 엉덩이 일으켜 겨우 몇 걸음 걸을 때

이젤 위에 펼쳐진 동네 어르신들이 힘 겹게 한 글자 한 글자

써놓은 그들의 인생야기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든에서 아흔을 훨쩍 넘긴 동네 작가님들의 작품은

가히 놀랍기만 했다. 어디서 시, 산문, 수필을 제대로 배웠을 리 없는 시골 동네 할머니들일 텐데

작가라 불릴만한 그분들의 필력을 보고 감탄과 존경의 마음마저 든다.


순간 나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나의 글은 과연 이분들 만큼이나 진솔했을까


작품 하나하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 보니

금세 빠져든다. 한 분 한 분 할머니들의 인생 자체가 예술이고 작품인 것이다.


그냥 살아온 이야기들

가슴속 한 구속에 묻어둔 그들의 이야기들이 아름다운 시가 되고 대하드라마 같다

그러니 작품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그 울림이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 하나(늙은 이유)를 먼저 소개해볼까 한다.

작가 미상의 원작 사진

대문사진 출처 : 방탄할메 4(이응노의 집 촬영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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