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만들어 낸 맛

'묵은지 김치찌개' 예찬

by 바람아래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장거리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집에 도착하면 뭐부터 먹을까' 하고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을 꼽으라면 단연 '김치찌개'가 첫 번째다.


요즘처럼 날씨가 쌀쌀할 때 따끈한 국물의 위력까지 더해져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는데 제격이다 보니 한국인의 DNA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영원한 소울푸드는 역시 김치찌개라 할 수 있겠다.


돼지고기, 참치 등을 넣어 다양한 종류의 맛을 만들어 낼 수 있기에 세계 어떤 나라의 음식과 비교해 봐도 그 음식의 변신은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화려하기까지 하다.


한국인에게는 그렇게 아주 흔하디 흔한 메뉴지만 맛을 이끄는 것은 단연 김치다.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중에 맏형은 역시 포기배추김치 일 것이다.


사각사각한 갓 담은 김치도 밥도둑이 되기도 하지만 그 김치에 시간을 겹겹이 쌓아 오랜 기간 숙성해 묵히면 감칠맛이 폭발해 또 다른 맛을 창조해 내니 참 신통방통한 녀석이다.


그러나 잘 숙성된 묵은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맛있는 김치찌개를 먹을 기회도 많지 않다. 거리의 흔한 식당에 가보면 대부분 수입 김치에 갖가지 조미료가 범범 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짧은 점심시간 탓도 있지만 그저 그런 김치찌개로 '점심을 먹는다'기 보다 '한 끼 때운다'는 심정으로 의미 없는 저작활동을 하기 일쑤다.


제 아무리 화려한 레시피를 갖고 있다 해도 인공의 조미료가 시간의 맛을 대신할 수 없기에 잘 익은 묵은지가 내어주는 감칠맛을 따라 하기는 불가능하다 하겠다.


그런데, 우연히 들른 시골 허름한 식당에서 상상도 못 할 맛의 묵은지 김치찌개를 만났을 때의 기분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한 친구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듯 반갑기 그지없다.


그날은 추석연휴, 점심을 늦게 먹게 된 상황이었다.

가을이 오는 한적한 시골 마을을 지나다 눈에 띄는 노포 한 곳이 보였다. 딱히 마땅한 메뉴도 생각도 안 나고 배도 고프고 해서 아무 데나 가서 한 끼 때워야겠다는 심정으로 차를 몰았다. 조그마한 시골 마을 한 식당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우르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차를 멈춰 세우고 직감적으로 그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수십 년은 된 듯 살 짝 어두운 조명과 식당 특유의 고기냄새, 기름 냄새 등이 섞인 묘한 냄새가 코를 살짝 자극한다. 다행히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기에 자리를 잡고 다른 테이블 손님들이 뭘 먹고 있나 살폈다. 양쪽 테이블 모두 김치찌개 정확히 말하면 묵은지 김치찌개였다.


벽에 걸린 메뉴판을 봐도 묵은지 김치찌개개가 첫 번째로 쓰여있어서 주저 없이 3인분을 주문했다.

몇 분이 지나지 않고 전골냄비에 얼마나 오래 숙성되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시커무래한 묵은지가 밑에 깔리고 그 위에 선홍빛 돼지고기가와 대파, 두부, 팽이버섯이 장식되어 함께 나왔다.


평소 회사 근처 식당에서 먹던 그런 김치찌개와는 일단 뭔가 달라도 많이 달라 보인다. 그렇게 맛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맛을 기대하는 순간 찌개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다.


그리고 몇 분 후 선홍빛 돼지고기가 먹음직하게 익어 갈 즈음 배가 고팠던 가족들이 일단 국물부터 맛을 보기 시작한다.


'오호 이거 무슨 맛이지!' 하며 아내가 놀라워하자

'엄마! 이거 무슨 맛이에요? 맛있네!' 하며 아들의 표정이 밝아진다.

이때다 싶어 나도 국물을 한 술 떠먹어본다.

'야 이거 묵은지 제대로 다! 이게 묵은지라는 거야. 맛있네 많이 먹어!'


처음에는 묵은지의 꿉꿉한 향이 젊은 입맛에 맞을지 고민을 하기도 했는데 고1 아들의 입맛을 제대로 저격했다. 아들은 국물 한 숟가락씩 떠먹으며 연신 '맛있다'를 연발한다.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기도 했다.


우리는 별다른 말도 없이 감탄만 하며 밥 한 공기 뚝딱 해치워 버렸다. 다 먹고 나니 민망하기도 했다. 며칠 굶은 사람들처럼 냄비 바닥이 보일 깨까지 싹 다 먹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노포의 맛의 비결의 주인공은 의심의 여지없이 역시 '묵은지', 조연은 '돼지고기'다. 두부와 파는 그저 거들뿐.고기는 씹는 맛도 일품이지만 고기 냄새가 아예 없다. 방금 도축한 돼지고기를 받아다 쓰지 않고서는 그런 빛깔과 맛을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제 아무리 유명한 세프라도 시간이 만들어 낸 맛을 따라 하지는 못할 것이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 배는 허기지고 마음은 공허할 때 그 모든 빈 곳을 채워줄 것은 역시 묵은지 김치찌개.


그렇게 새로운 맛집 하나 더 지도에 저장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프랑스인 친구가 파리에 올 때 김치를 사 오라고 했던 친구도 생각난다. 김치의 맛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가는 세상. 세상은 또 어떻게 변해갈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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