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지, 그 침묵의 언어

by 바람아래

어릴 적 외할머니댁에 가면 할아버지께서 삽으로 손수 파서 만들었다는 우물이 있었고, 두레박이 있었다.

동네 집집마다 마당이 있었고, 마당 어느 한편에는 어김없이 우물이 있거나 형편이 조금 나은 집에는 물펌프가 하나쯤 있던 시절을 보냈다. 그런 물가 주변에는 어김없이 빨강 또는 파랑 플라스틱 바가지 하나는 놓여있었다. 동네 약수터에 가도 길쭉한 손잡이가 달린 바가지 하나쯤은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었다.


흔하디 흔한 그런 플라스틱 바가지는 일 이천 원이면 살 정도로 저렴했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생활용품이었다. 그래서, 동네 개구쟁이들은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의 경기를 보고 나서는 어른들 몰래 발로 깨거나 머리로 깨기도 하다가 동네 아저씨들에게 들키면 혼쭐이 나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값싸고 흔했기에 우리는 몰랐다. 그 보잘것없는 물건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바가지가 없었다면 아무리 맑은 샘물도, 아무리 시원한 지하수도 우리의 갈증을 적셔줄 수 없었다는 것을. 흔한 것들의 가치는 그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법이다.




늦가을, 한 산사를 찾아간 적이 있다. 만추의 오후 햇살이 툇마루 위에 게으르게 누워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천천히 걸을 때마다 일상의 찌꺼기들이 몸 밖으로 흘러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깊은 들숨과 날숨의 끊임없는 대화, 영혼이 정화되는 시간, 산사의 가을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고 움직임이라고는 바람과 낙엽, 그리고 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찬 물줄기뿐. 기꺼이 산사의 시간은 마음속 공백을 여백으로 만들어 주었다. 나는 이 호사를 놓칠세라 누릴 수 있는 만큼 누렸다.


물은 누구에게도 차별하지 않는다.

어디서 솟아나는지도 모를 산 깊은 곳에서 흘러와 나와 당신을 가리지 않고 생명을 불러주는 물. 그러나 그 물을 마시려면 무언가가 필요했다. 손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아내는 도구가. 샘가에 두 개의 바가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공교롭게 하나는 파란색, 하나는 빨간색. 목이 말랐지만 순간 손이 멈칫했다. 어느 것을 집어야 할까. 찰나의 망설임이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사람이었던가. 바가지는 그저 바가지일 뿐인데.


우리 세대는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운동회를 하며 자랐다. 흰색 띠를 어깨에 걸거나 파란색 띠를 사용했다. 달리기를 하고 줄다리기를 하고 목이 터져라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를 외치며 응원을 했다. 경기를 지면 억울해서 울기도 했지만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다시 함께 뛰어놀았다. 그때 우리는 알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흰색은 빨간색으로 바뀌었지만 파랑과 빨강으로 나뉘어, 결코 함께 뛰어놀 수 없는 세상을 살게 되리라는 것을.


파랑과 빨강. 그 두 색깔은 이제 사람들의 무의식 속 깊이 스며들어 바가지를 고르는 순간조차 멈칫하게 만든다. 시나브로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색깔로 갈라졌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서로를 물어뜯고 잡아먹을 듯 싸우는 그 색깔들을 우리는 언제까지 바라봐야 하는가. 그 끝은 과연 존재하는가.


산사의 바가지들은 싸우지 않는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그들은 그저 나란히 앉아 있다. 그저 목마른 사람이 오면, 파란색이든 빨간색이든 기꺼이 물을 담아 건넨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물은 똑같이 시원하고, 갈증은 똑같이 사라진다.


이 두 바가지가 가르쳐주는 정치의 본질은 그것은 색깔이 아니라 사람들의 갈증을 축이게 하는 것이라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모금 전하는 것이라고. 서로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명을 돌보는 것이라고.


오후 햇살아래 그 두 바가지는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기억하게 하고 있는지 모른다. 색깔보다 먼저였던 것, 경계보다 앞서 있던 것, 갈증과 그것을 채우려는 손길, 그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만남을.


천 원짜리 바가지 하나가 오늘 나에게 묻는다.

"우리는 언제쯤 다시 그저 바가지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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