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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아래 Mar 31. 2023

06 충격적인 한 마디에 "무조건 Go"

1999~2000 인생 터닝포인트가 된 필리핀 어학연수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면서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 어느덧 대학 4학년 1학기 끝.

무더위가 한 풀 꺾인 8월 말 교정은 아직 여름방학이라 비교적 한산했다. 같은 과 친구(H)와 법과대학 앞 벤치에 앉아서 우리는 한 학기를 남긴 앞날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한숨 섞인 우려와 근심만이 가득했다.


그 이유는 졸업까지 한 학기를 남겨둔 시점에서 국가경제는 휘청휘청, 사회 초년생으로서 구직을 하기가 녹녹지 않은 상황. 졸업 후 앞날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취직하려면 남들처럼 영어는 좀 해야 되지 않겠나 싶어서 학교 부설 어학원의 여름방학 단기 회화반에 다녔다.


그곳에서 우리들의 운명을 바꿔준 귀인(?)을 만났다.

이 분은 지역에 있는 모 대학 교수님(여)이다. 나이도 지긋하신데, 20대의 젊은 학생들과 영어회화 수업을 들으시며 정말 수업에 진심이셨다. 모든 과정이 끝나고 그 교수님은 강사님을 포함한 반우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음식으로 허기진 청춘들의 배를 채워주셨다.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그 교수님이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짖꿎게도 남편분과의 러브스토리를 청했다.


그분들의 러브스토리 중에서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이랬다.

70년대 후반 학번으로 캠퍼스커플이었다. 그때 두 분은 '다른 나라의 20대 청춘들은 어떤 꿈과 생각을 갖고 있는지 직접 듣고 싶었다'라고 했다. 그래서, 두 분은 해외여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당시 남자 친구(현 남편)는 시간 나는 대로 건설현장 막일을 하면서 한 푼 두 푼 열심히 모았다고 한다. 결국 여자 친구를 포함한 모든 경비를 마련하고 그 길로 세계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이하 내용은 너무 길어서 생략)


책에서 배운 대로 70년대 우리나라는 온 나라가 새마을 운동을 할 때였다. 그리고, 해외여행은 아무나 갈 수 없는 시절. 해외여행을 가려면 국가의 허락(?)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해외여행자율화를 찾아보니 198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함)


국가적으로는 산업화와 민주화로 격동의 시간, 먹고살기 힘들고, 말 한마디 자유롭게 하기 어려웠던 사회분위기 속에서 그 두 청춘들은 본인들의 꿈을 실현. 더군다나 '다른 나라 학생들의 생각을 듣겠다'는 일념으로 그 어려운 걸 해냈다는 말에 친구와 나는 제대로 한 대 맞은 듯했다. 그분들의 용기, 추진력, 그리고 그분들의 20대에 갖었던 세계관과 비교된 친구와 나는 '우리는 대체 4학년 1학기를 마칠 때까지 무엇을 했나'라는 반성,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H야 우리도 졸업하기 전에 외국이라도 한 번 가볼까? 영어도 배우고, 어때"하고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오케이, 가자"고 답했다. 사실 나는 군 제대 후부터 형편상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던 상황, 그래도 악착같이 모은 돈(취업준비할 때 쓰려고 모았던 Seed money)이 있어서 나는 그걸로, 친구는 부모님의 도움으로 필리핀으로 정확히 2주 뒤 아무것도 모른 채 떠났다. (그때는 'Y2K'라는 말이 세계적으로 유행, 2000년이 되면 전지구적으로 대변화, 지구종말 등 근거 없는 "썰"들이 난무, 세계적으로 어수선함)


그때 솔직히, 고생하며 악착 같이 모은 돈, 의미 없이 다 써버리는 거 아닌가 두렵고 불안했다.

 

어찌 되었든 아무런 정보도 준비도 없이 떠난 우리들은 그야말로 막무가내였다. 대학도 정하지 않고 그냥 무턱대고 가서, 택시 기사가 안내해 준 가까운 대학에 내려, 무작정 등록했다. 첫날 맥도널드에서 Fork와 Pork의 발음을 구분 못해 난감했던 순간을 지금도 있을 수 없다. 그렇게 1년을 그 학교에서 공부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대학교는 그래도 필리핀에서 알아주는 최고 명문 사립대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시설도 좋고, 교수님들도 좋았다. 나는 오전에는 회화 과정을 오후에는 비즈니스 코스를 들었다. 일반 회화과정에는 주로 중국, 일본, 한국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반면, 비즈니스과정에는 취업을 위해 등록한 영어 수준이 높은 학생들이 종종 있었다.


필리핀에서 있는 동안 나도 후회 없이 공부를 했는데, 그 외에도 많은 간접 사례를 경험하기도 했다.

인생 진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실감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온 동갑내기 K는 진짜 영어 한 마디 못하는 상태에서 왔다. 도착 다음 날부터 이 친구는 두꺼운 한-영 사전을 들고, 현지 마켓이나 쇼핑몰을 혼자 겁도 없이 돌아다녔다. 본인이 직접 물건을 사면서 영어로 말하려는 기회를 늘려볼 참이었던 것. 소통이 안될 때 그 친구는 단어를 찾아서 현지인들에게 사전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발음을 집중해서 듣고, 그들이 이해하고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을 보면서 영어를 배워나갔다. 그렇게 3개월가량을 하더니, 그때부터는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그렇게 그 친구는 현지에서 대학까지 마쳤다. 그러던 어느 날 자취하던 아파트 옆 방에서 낯선 여인(?)의 비명소리에 놀라 달려가보니 일본인 여학생 자취방에 강도가 들었던 것, 대한민국 예비역 병장은 무서울 게 없었다. 보자마자 그 강도를 제압. 결과적으로 그 친구는 그 일본 여학생과 연인으로 발전, 그 둘은 미국으로 함께 다시 유학길에 오르고, 결혼에 골인 결국 성공한 치과의사가 되어 한-미-일을 오가며 잘 살고 있다.


필리핀에서 1년, 나에게 인생 터닝포인트가 됐다.

영어를 배우기도 했지만, 권총을 든 노상강도를 보기도 했고, 자식 뻘 되는 유학생 유학비를 사기 치는 사람, 한국에서 사고 치고 도망쳐온 사람부터,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위해 이민 와서 열심히 사는 분 등 다양한 사연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인생에 대해서 심도 있는 성찰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에 혼자 가도 살 수 있겠다'는 강한 자신감을 얻었다. 그 자신감으로 한국에 돌아와서 사회생활을 할 때 뭐든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필리핀에서 얻은 경험은 궁극적으로 내 인생에서 힘들고 지쳐 있을 때마다 자양분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인생 어디서 어떻게 될지 앞날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평상시에 열심히 후회 없이 살아야 된다는 만고의 진리를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가끔씩 우리에게 충격적인(?) 한 마디를 해주신 교수님이 생각날 때가 있다. 여전히 멋진 인생 사시고 있으시겠지... 여전히 주위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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