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여성들의 우먼스 나잇(Women’s Night)

국문장편소설

by 규방즈
아브람보스, 저녁식사.jpg

그림을 먼저 감상해볼까요.


호화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긴 직사각형의 식탁에 모여 있습니다. 식사를 하려는가 봅니다.


음식을 내오는 여성이 그림의 왼편에서 식탁을 향해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림 중앙에서 뒷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는 여성은 아마 이 집의 여주인일 것으로 보입니다. 여주인의 시선은 왼쪽을 향해 있네요. 식탁의 가장 앞자리에 앉은 다른 여성 손님과 대화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준비한 것들이 잘 대접되고 있는지를 총괄하려는 듯한 포스도 느껴집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의 부피감, 목을 두른 장신구의 존재감에서도 그러한 지위가 풍겨오지요.


오른쪽 아래에는 실내에서 기르는 강아지 두 마리가 놀고 있고요, 그 바로 뒤엔 화려한 벽난로와 기둥의 구조물도 보입니다. 이 집의 창문은 길고 크게 나 있어 층고가 높은 걸 알 수 있습니다. 중앙의 창으로는 저 너머 숲의 풍경이, 오른쪽 창으로는 뾰족한 지붕을 가진 건물이 일부 보입니다. 방의 크기도 상당해 보이지요.


꽤나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거나 혹은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여성들이 모였나 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그려진 것 외에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끔 하는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뭘까요? 바로 이 그림의 제목인 <남편이 불참한 부인들의 대화 : 저녁식사>입니다.


남편들이 없는 자리에서 그녀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남편이 불참한 부인들의 대화 : 저녁식사>라는 제목은 이 그림이 단순한 식사 자리를 묘사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그림의 제목을 작가가 직접 붙였는지 후대에 그렇게 붙은 것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어떤 방식이든 간에 그 제목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그림에서는 여자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그녀들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왠지 머릿 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있죠? 아무래도… 결혼한 여성으로서 겪는 여러가지 곤란한 문제들을 공유하고 있겠죠? 남편과의 관계, 부부의 은밀한 취미, 시댁 식구와의 갈등, 친정 부모와의 관계 유지, 아내와 딸 그리고 어머니로서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 결혼 자체에 대한 회의감 등등.


너, 어디까지 이야기 할 거니?


그리고 그런 문제들을 아무렇게나 털어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적당히 사적이어서 다른 부녀자들과 친밀감과 유대를 쌓기에 적절하면서도, 적당히 남과 나눌 수 있을 만해서 내 체면을 손상시키지는 않는 에피소드를 골라야 하니,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느라 바쁠 것입니다. 모두가 결혼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녀들은 같은 상황에 처해있지만 각자의 결혼 생활은 정말 다 다르거든요.


눈치를 잘 살펴야 합니다. 계산하지 않고 말을 했다가는 괜히 누군가의 질투와 열등감을 불러 일으켜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해야할 수도 있을 것이고요. 역으로 내 마음 속에서 그런 종류의 감정이 피어 올랐다면 적당하게 감추거나 처리하는 기지도 발휘해야 합니다.


어떤 때에는 에피소드를 적당히 각색해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만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에피소드에 약간의 살을 붙이거나 떼어내는 식으로 조정을 거쳐야 합니다. 어디까지 이야기 할 것인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소설 문화와 국문장편소설


저 그림 속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여성들 역시 자기네들만의 소통 창구가 필요했을 것이고 또 소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러한 문화 중에서도 ‘국문장편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1966년 8월, 창덕궁 낙선재에 소장돼있던 자료들이 밖으로 나오면서 국문장편소설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주로 가문의 흥망과 번영, 가문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을 다룹니다. 특히나 부부 갈등이 주요 서사이지요. 명칭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글로 쓰여졌습니다. 한글은 그 당시 주류 문화의 표기 수단이었던 한문이 아니지요. 또한 그 분량이 상당해서 수십 책에서 백여 책에 이릅니다.


국문장편소설의 주 향유층인 사대부 부녀자들은 주로 한글을 사용해 일상을 살아가며 대장편인 소설들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한 지식과 시간적 여유를 가졌습니다. 아이를 돌봐주는 보모, 가사 노동을 대신하는 하인들이 있었기에 그림, 시, 소설 등의 취미 생활을 할 여력을 보장받을 수 있었지요.


그들은 소설을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창작하거나 마음에 드는 작품은 손으로 베껴 쓰기도 했습니다. 또, 서로 주고받으며 돌려 보기도 하면서 국문장편소설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해나갔습니다. 소설을 집안의 보물로 소중히 보관하여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기도 하고 혼인하는 자녀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을 정도라고 하니 국문장편소설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애정을 알 만 하지요?


모여라, 조선의 부녀자들이여!


핵가족이 대부분인 현대 사회에서 부부 갈등은 부부 둘 개인만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그렇지 못한 때도 많습니다. 하물며 조부모 세대에서 손자 세대까지 삼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 체제에서 부부 갈등은 모든 가족 구성원들의 관심사이자 이야깃거리가 될 수밖에 없지요. 부부의 어색해진 기류를 지켜보는 눈들이 많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비밀을 가질 자유도 없고요.


조선의 사대부 여성들은 혼인 생활에서의 어려움, 특히 털어놓기 곤란한 심정을 국문장편소설을 향유하는 것으로 해소했습니다. 집안내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가족들의 논쟁, 다소 한심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희화화와 비꼬기, 부부의 침실에서 일어나는 서슬퍼런 신경전, 아들 부부의 문제에 지나치게 관여하여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시부모, 사위를 미워함이 극에 달해 딸의 곤란한 입장은 안중에도 없는 친정 부모, 눈치 없이 끼어들어 분란만 조장하는 할머니, 우리 부부와는 달리 화목하게 잘 지내는 형님/동서네 부부, 남편의 고집과 호기로움을 부추기는 남편의 친구들 등 손가락으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재들이 국문장편소설에서 펼쳐집니다.


여성들은 국문장편소설을 향유할 때 무리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한 사람이 낭독을 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듣기도 하고요, 창작을 할 때에는 앞 사람이 쓴 이야기를 뒷사람이 이어받아 릴레이로 쓰기도 했습니다. 한 작품을 베껴 쓸 때도 여러 명이 모여 각자 쓸 부분을 분담하기도 했고요.


여기서 상상력을 조금 더해 봅시다. 그렇게 함께 책을 읽고, 창작하고, 베껴 쓸 때 여성들이 모여서 무슨 이야기들을 나눴을까요? 저는 너무 궁금하거든요! 소설에서는 차마 묘사하기 부담스러운 마음을 공유하기도 하고, 소설 속 인물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갑론을박을 나누었겠죠? 소설과 자기네들의 일상을 견주면서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했을 것도 같고요. 배꼽이 빠지도록 깔깔 웃으며 흉도 봤을 것 같네요. ‘소설보다 더 한 현실’을 공유하며 토로하고 위로하면서 한바탕 파티가 벌어졌을 것 같습니다. 그릇에는 맛있는 간식도 좀 담아두고, 은은하게 단맛이 나는 음료도 한 잔 씩 했겠죠? 조선 여성들의 우먼스 나잇(Women’s Night)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집니다. 타임머신만 있다면, 저도 한번 그 무리에 들어가보고 싶습니다.


음, 그렇다면, 오늘의 부녀자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 어떤 이야기들을 나눌까요? 오늘의 우먼스 나잇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까요?





글 송혜란

우연한 계기로 고전소설에 사로잡혔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없다. 석사와 박사 모두 국문장편소설의 하위 장르인 삼대록계 소설로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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