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전(實戰)
페드로라고 불리는 사람이 내 앞에 앉았다. 귀 밑으로부터 아래턱까지 더부룩이 나 있는 수염을 어루만지며 옆의 남자에게 통역을 하라고 한다. 학위 논문을 읽으려니 영어가 필수여서 나는 이미 영어를 마스터했다. 하루 만에 문법책을 완독 했고 모두 기억했다. 그 후로는 뉴스 등 영어 방송을 시청했다. 지금은 미국 드라마나 영화 등을 원어로 보는데 별 지장이 없다. 그러나 나는 영어를 모르는 척 한국말만 썼다. 페드로는 나를 천천히 훑어보며 말한다.
"그래, 미스터 강과 닮았군. 네 아버지와 닥터 킴은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일하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모든 비용과 연구 환경을 제공해 주었지.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개발된 연구 성과를 몰래 빼돌렸다. 우리는 배신을 당한 거다."
성진 아저씨의 이야기를 토대로 추측해 보면 앞에 앉은 외국인은 미국 CIA 요원들을 훈련시키던 그 교관이다. 그가 직접 낯설고 먼 땅까지 모험을 한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 인류를 위한 연구를 사욕을 채우기 위한 연구로 마음대로 방향을 바꾼 건 그들이었다. 아빠와 아저씨가 그들을 배신한 게 아니라 그들이 아빠와 아저씨를 배신한 거다. 페드로는 원래부터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툰 그쪽 사람들이 자주 하는 손짓을 섞어가며 말을 이어간다.
"나는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닥터 킴이 연구를 수행할 당시 소련을 붕괴시키기 위한 여러 공작이 함께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그 공작들은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 우리 요원들도 여럿 목숨을 잃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연구 결과를 얻어 훈련생들의 능력을 끌어내는 것이 먼저 간 동료들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다. 결국 우리의 계획은 무산되었고 나는 징계를 받았다. 승진에서도 누락되었고 말단 직급으로 강등되어 내 화려한 커리어가 막을 내렸다. 네 아버지 덕분에..."
열일곱 어린아이에게 자기 신세를 풀어놓는 대우를 해 주는 건 여기 어른들과 많이 다른 문화를 가졌음을 말한다. 나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봐주는 것은 고마우나 아빠와 적대점에 서있는 한 그에게 호감을 가질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모두 아빠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 치욕을 갚는 길은 네 아버지를 찾아내서 그 연구 결과를 돌려받는 거라고. 상부의 허락을 받고 네 아버지와 닥터 킴을 찾아 나선 지 벌써 십 수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소련은 스스로 붕괴되었고 상부에서도 더 이상 그 연구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내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스스로와 약속을 했기 때문이지.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네 아버지를 찾기 위해 그 어떤 짓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나의 조국에 대한 범죄자고 나는 그 범죄자를 반드시 찾아내서 죄를 물을 것이다."
숨을 한 번 고른 페드로는 옆 남자에게 말했다.
"미스터 리, 이 아이를 지하 보호실로 데리고 가게. 제대로 말할 때까지 가둬두는 게 좋겠어."
"페드로, 그건 좀... 아직 아이라..."
페드로의 인상이 굳어지며 말한다.
"상호 의무 10조를 어길 텐가?"
손가락에 붕대를 감은 남자는 그제야 동료를 부르더니 내게 수갑을 채웠다. 한 번 당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매우 조심하는 모습이다. 나는 지하 보호실이 어떤 곳인지 가보고 싶었다. 혹시 그곳에 성진 아저씨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순순히 그들을 따라 건물 계단을 내려가니 긴 복도 양 옆으로 수많은 철문들이 줄지어 있다. 각 철문에는 창살이 나 있고 그 틈으로 안이 들여다 보인다. 나는 복도를 지나가면서 좌우 창살틈을 모두 살폈다. 그러던 중 성진 아저씨가 앉아있는 방을 발견했다. 역시 그들은 아저씨도 이곳으로 납치해 온 것이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가서 그 남자들은 나를 방에 집어넣었다. 철문이 닫히고 철컹 자물쇠 잠기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수갑을 풀지 않은 채 나를 방에 가뒀다. 침대 하나에 테이블 하나, 의자 하나가 전부인 작은 방에 벽 쪽으로 화장실 문이 있다. 감옥에 갇히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했다. 이곳은 인권을 위한 어떠한 법률도 미치지 못하는 동떨어진 세상 같다. 여기서 죽으면 쥐도 새도 모를 것 같다.
성진 아저씨를 발견했으니 이제 함께 여기서 나가야 한다. 내가 쓸 수 있는 능력은 염력과 투시력이다. 염력은 질량이 작은 물체를 들어 올리거나 움직이는 데 사용된다. 아직까지 내가 염력을 사용해 움직일 수 있는 질량의 범위는 1kg 내외다. 투시는 내 시야가 미치는 범위까지다. 눈이 좋은 편이므로 그 영역은 반경 약 30m 정도다. 둘을 함께 사용하면 이런 수갑이나 철문쯤은 쉽게 열 수 있다. 수갑을 쳐다보니 그 안의 구조가 보인다. 열쇠가 눌러 젖혀야 하는 돌기가 보인다. 내가 그 돌기를 염력으로 움직이니 찰칵하고 수갑이 풀린다. 철문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하니 철커덩하고 열린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성진 아저씨가 있는 방 앞으로 달려갔다.
"아저씨."
성진 아저씨는 나를 보더니 놀라서 뛰어왔다.
"민수 아니냐. 네가 어떻게 여기에..."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빨리 여기서 나가요."
내가 철문을 가만히 바라보니 철커덩하고 열린다. 아저씨가 또 한 번 놀란다.
"이제 염력을 자유롭게 쓸 수 있구나..."
우리는 계단을 올라가서 건물 로비로 향했다. 로비로 이어진 마지막 계단을 올라설 때 수십 명의 국정원 요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우리를 둘러쌌다. 몇 명은 우리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다. 요원들 틈에서 페드로가 걸어 나오며 박수를 친다.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군. 혹시나 했는데 수갑이나 철문은 아예 소용이 없네. 대단해, 대단해... 하하하."
성진 아저씨가 양팔을 벌려 총구가 쏘아보는 방향으로부터 나를 가로막는다.
"페드로, 아이는 보내줘라."
페드로는 오른손 검지를 세워 좌우로 흔들며 대꾸한다.
"아니지, 아니지. 저 아이야말로 연구 대상이야. 어쩌면 망가져 쓰러진 나를 다시 일으켜 줄 기회가 될지도 모르지."
"연구 결과는 영훈이가 가지고 있고 이미 사라진 지 십 년이 넘었다. 이 아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어."
"그렇게 생각하나? 우리가 이 아이를 언제부터 모니터링했는 줄 알아?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다. 그때부터 얼마 전까지 우리가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멍청한 놈이었지. 또래보다 더 나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데 갑자기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어.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겠나? 뇌 능력을 연구하던 자기 아버지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자연스러운 거 아니야?"
페드로는 옆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요원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이 한 발자국씩 걸음을 떼며 포위망을 점점 좁혀오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총을 겨누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모두 다섯, 나머지 다섯은 한 명씩 총을 든 사람 옆에 붙어서 다가오고 있다.
나는 생각을 집중하고 우선 총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뇌파를 쏘았다. 여기저기서 '악!' 하는 비명이 들렸다. 방아쇠에 걸려있던 손가락들이 뒤로 젖혀지며 모두 부러져 나간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총들은 한 데 뭉쳐져 로비 한 구석으로 날아갔다. 나머지 요원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이번에는 그들의 다리에 집중했다. 그러자 달려들던 그들이 바닥에 달라붙은 듯 제자리에서 꼼짝 못 하고 있다. 양 팔만 허우적거릴 뿐이다. 그 틈에 나는 성진 아저씨 손을 잡고 밖을 향해 뛰었다. 문을 나와 안쪽을 돌아보니 몇몇은 제자리에 선 채 허우적거리고 또 몇몇은 손가락을 부여잡고 바닥에 뒹굴고 있다. 그들 틈에 페드로가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귀에 대고 서있다.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 같다.
우리는 건물 바로 앞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아무 차나 골라서 운전석 문 손잡이 부분을 뚫어지게 본다. 내부 구조가 훤히 보인다. 얼마 전 읽은 자동차 구조에 관한 책 수십 권의 내용을 떠올리자 어느 부품을 건드려야 문이 열리는지 알 수 있었다.
"운전은 내가 하마."
자동차 문이 열리자 성진 아저씨가 운전석에 앉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시동을 걸 수 있겠니?"
성진 아저씨가 묻는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하고 책에서 본 내용을 토대로 생각을 집중하자 '드르릉'하고 시동이 걸렸다. 차를 몰아 메인 게이트 앞에 도착하니 문이 닫혀 있다. 제법 두꺼운 철문으로 만들어져서 차로 들이받아 부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장정 예닐곱은 매달려야 겨우 움직일 정도로 무거워 보인다. 내가 염력으로 열기에는 너무 버거운 물체다.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성진 아저씨가 힌트를 준다.
"염력에 한계는 없다. 한계는 인간이 스스로 만드는 거야. 감마파의 파동 신호가 프랙탈(Fractal) 구조가 될 때 그 능력이 발휘되는 거다. 프랙탈은 무한히 반복되면서 커지는 패턴이다. 그 패턴이 커지는 데 한계란 없다. 그걸 생각하고 해 봐라."
어떤 중요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린다. 다시 생각을 집중하고 뇌파를 키우는 데 전념한다. 그러자 두꺼운 철문이 굉음을 내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