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
철문이 서서히 열리자 차 한 대가 빠져나갈 틈이 만들어졌다. 성진 아저씨가 액셀을 깊이 밟으니 차는 순식간에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한참을 달리자 양재동 예술의 전당이 보인다. 뒤쪽으로 자주 시선을 주며 운전하던 아저씨는 따라붙는 차가 없는 걸 확인하고 나직이 말한다.
"네 아버지 훈련법이 효과가 크구나. 꿈속에서 하는 거 말이다. 기억나는 걸 말해줄 수 있겠니?"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해 보고 입을 뗐다.
"꿈에서 이상한 기계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동전을 움직였어요. 동전을 이루는 원자들의 진동을 느끼면서 그 생각을 증폭시켰어요. 가끔 주위 모든 사물의 진폭이 커지면서 바닥이 꺼지고 아래로 추락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매일 그 꿈을 꾼 건 아니에요. 잠을 깨고 나서 그 꿈이 기억난 날은 손에 꼽을 정도지요. 대부분은 다른 꿈을 꾸었어요. 어떤 날은 은주와..."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말을 얼버무렸다. 성진 아저씨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듣고 있다.
"그런데 그 꿈을 꾸고 났을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어요.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고..."
"사실 그 꿈이 모두 기억나지는 않을 거다. 스스로 행한 훈련들이 강도가 다르고, 강도가 센 것들만 깨어나서도 기억에 남을 거야. 너는 너도 모르게 그 꿈을 매일 꾸었을 거야."
"사실 전 그 이상한 장치 이름이 뇌파증폭기라는 걸 꿈속에서 알고 있었어요. 그것도 좀 이상해요."
“꿈은 잠재의식 깊은 곳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역할을 한다. 네가 평소에 기억하지 못하는 사소한 일들이 꿈속에서 나타날 수 있다. 너는 분명히 그 물건의 사진이나 그림을 어디선가 봤을 거야. 관심을 가지고 봤던, 그냥 스쳐가며 봤던. 너무 오래되어 현실의 기억에서 사라진 단어도 꿈에서 나타날 수 있다. 내가 궁금한 건 네가 갓난아이 때부터 꿈속에서 훈련을 하도록 너에게 뭔가를 했을 텐데 뭘 어떻게 한 건지 하는 거다."
아빠의 연구는 성진 아저씨와 떨어지고 나서도 계속 이어진 것 같다. 성치 않은 몸의 과학자가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연구에 몰두하는 어느 영화 한 장면이 그려진다. 성진 아저씨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말을 이었다.
"CIA가 우리를 찾기로 마음먹었으면 이 땅에서 우리가 숨을 데는 없다. 단지 네 아버지의 연구 결과가 그들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키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네가 가져온 그 미니칩은 내 집 지하에 보관해 두었다. 다행히 그들은 아직 그 지하실을 못 찾은 거 같아. 그런데, 그들이 그 장소를 찾는 건 시간문제다. 빨리 그 자료를 안전한 곳에 옮겨놓고 폐기해야 한다."
그 말을 하면서 아저씨는 차를 몰아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우리는 지금 제천으로 간다. 오늘 밤 안에 너는 그 자료를 보고 모두 기억해야 한다. 네 아버지 연구 결과는 모두 네 머릿속으로 옮겨질 거다. 지금 네 능력으로 충분히 할 수 있다."
긴 시간을 달려 제천시 외곽에 진입했다. 커다란 소나무 뒤로 작은 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담한 마을을 환한 보름달이 포근하게 비추고 있다. 성진 아저씨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나는 멀리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아저씨, 집 안에 누가 있어요."
"놈들이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나 보다. 모두 몇 명이나 보이니?"
"두 명이요. 둘 다 총을 갖고 있어요."
"흠... 총은 더 이상 위협이 아니지.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손가락이 부러질 테니. 이상한 건 서울에서 네 능력을 봤을 텐데 두 명만 보냈다는 거다."
우리는 차를 멀찍이 세워 놓고 조용히 내렸다. 집 가까이 다가가니 담 너머로 그들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들은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들이다. 성진 아저씨에게 귓속말을 하니 놀라는 표정이다. CIA 요원이 직접 온 거라고 한다. CIA든 KGB든 어쨌든 사람이므로 내가 그들을 제압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성진 아저씨와 내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두 사람은 각각 권총 방아쇠에 오른손 검지를 건 채 마당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다. 나는 염력을 동원해 그 둘의 손가락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그들의 손가락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마당에 발을 들여놓자 숨어있던 그들이 달빛 아래로 나와 섰다.
"닥터 킴, 프리즈(Freeze) 앤 핸즈 업!"
그들 중 한 명이 아저씨를 멈춰 세운다. 그리고는 소음기가 달린 총구를 겨누며 양 옆에서 다가온다. 다시 한번 그들의 손가락을 움직이려 했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그들의 발도 붙잡아 둘 수 없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건지 영문을 몰랐다. 그들이 압박해 오자 우리는 양팔을 위로 올린 채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순순히 우리를 따라 가자. 몸에 구멍 나기 싫으면."
"너희는 CIA 소속인가?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성진 아저씨가 대화를 유도한다.
"기억력이 좋군, 닥터 킴.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연구 7동 지하 강당이었지 아마..."
"그러고 보니 실험 대상자로 왔던 친구들이군."
"바로 맞췄다."
"우리가 떠난 후에 성과는 좀 있었나?"
"뻔한 걸 묻는군. 우리가 조국을 위해 일할 기회를 박탈한 범죄자 주제에. 너희 두 코리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좌절했는지 모를 거다."
성진 아저씨는 시간을 끌며 내가 염력을 사용하기를 기다린다.
“아저씨, 안 돼요. “
“뭐가?”
“저들을 제압할 수가 없어요. 염력이 통하지 않아요.”
그들은 웃으며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알아들은 것처럼 말한다.
“흐흐흐. 네 생각대로 잘 안될 거다. 순순히 포기하고 말을 듣는 게 좋아.”
우리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직감한 성진 아저씨는 내게 나지막이 말한다.
“민수야. 잘 들어라. 너는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가야 된다. 그리고 후에 반드시 그 자료를 머릿속에 기억하고 칩을 부숴라. 그다음에 아버지를 찾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여기서 다치면 안 된다. 알았지?”
아저씨는 뭔가 결심한 듯 비장하게 말했다.
“아저씨도 같이 나가요. 제가 조금 더 집중해서 해 볼게요.”
“저들이 중요한 걸 발견한 모양이다. 뇌파를 보내는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하지만 이론적으로 상대보다 더 큰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저들이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다. 뭔가 트릭을 쓰고 있는 게 분명해.”
아저씨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나지막이 말을 이어간다.
“영훈이는 내 둘도 없는 친구이자 은인이다. 나 때문에 학위도 포기했지. 말하자면 길지만… 내가 그 친구에게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는 길은 너를 이곳에서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거다. 그러니 아저씨 말을 들어야 한다. 내가 신호를 주면 바로 눈을 감아라. 그 뒤에 지체하지 말고 대문을 나가 산으로 뛰어가는 거다. 최대한 멀리 도망쳐라. 나도 따라가겠다. 내가 널 찾을 거다.”
왠지 무서운 결말에 다다를 것만 같아서 식은땀이 난다. 나는 그 지시를 거역할 수 없다고 느끼고 눈으로 답했다. 성진 아저씨는 갑자기 그들에게 협조적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오케이. 내가 졌다. 자료를 넘겨주지. 대신 자료를 넘겨받은 후에 우리를 놓아준다고 약속해라.”
“오브콜스. 자료만 받으면 보내주지.”
아저씨는 눈으로 마당 한 구석에 있는 작은 창고를 가리켰다. 저 안에 자료가 있다는 의미인 것 같다. 한 명은 아저씨의 등 뒤에, 또 한 명은 내 등 뒤에 서 총구를 겨누며 창고 쪽으로 우리를 몰아붙인다. 우리는 서서히 창고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아저씨가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짧게 외쳤다.
“눈 감아!”
나는 눈을 감았고 아저씨 손에는 어느새 소화기가 들려있었다. 눈을 감았지만 눈꺼풀 너머의 모든 장면이 생생하게 보인다. 소화기가 내뿜는 흰 가루가 그들의 눈에 적중했다. 그들은 눈을 감싸 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눈을 뜨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나갔다. 그때에도 계속 소화기를 뿌려대는 아저씨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오니 넓고 푸른 밭이 보인다. 직선으로 뻗은 이랑을 따라 밭을 가로질러 산으로 향했다. 한 참을 뛰어 산길로 접어들 무렵 ‘피슝’하는 총소리가 났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아저씨가 얼굴을 땅에 묻고 쓰러져 있다. 집에서 나온 후 총에 맞은 것 같다. 그들 중 한 명은 쓰러진 아저씨 뒤통수에 총을 겨누고 있고, 또 한 명은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산 위로 뛰고 또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