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공태양(14)

도망자

by Neutron

한참을 기어올라 야산 중턱 즈음에서 뒤를 돌아보니 밝은 보름달 덕에 주위의 나무와 바위들이 분간되고 동네가 한눈에 담긴다. 저 밑에 총을 들고 다가오는 사람이 보인다. 제대로 훈련된 CIA 요원이 산을 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어느새 얼굴 식별이 가능한 거리까지 따라붙었다. 좁은 산길 양쪽으로 갈라선 측백나무들이 빼곡한 탓에 그쪽에서 나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으나 이대로 가다가는 따라 잡힐 것 같다. 나는 오솔길을 버리고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수림으로 들어가 큰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따라오던 남자가 내가 숨은 바위 근처에 다다랐다. 그가 방향을 잃은 듯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아저씨에게 총을 겨누던 남자가 어느새 뒤따라와서 그의 옆에 붙었다. 나는 바위 뒤에서 그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꼬마는 놓쳤나?"

"생각보다 빠르네. 그런데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야."

"지원 요청하는 게 낮지 않겠어?"

"한국 요원들을 동원할 수 있겠나? 지원받는다고 해도 너무 늦어. 닥터 킴은?"

"내 실수야.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다리를 조준한다는 게..."

"죽었나?"

"심장을 관통했어. 즉사했지."


나는 가슴이 꽉 막히고 정신이 아득해서 쓰러질 뻔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빠를 대신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성진 아저씨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처음 만난 날부터 남이라는 느낌이 없었다. 숨은 능력이 발현되어 이 사회의 계급이 하찮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로 인해 내가 더 이상 이 사회의 패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도 모두 아저씨 덕분이다. 살면서 이어진 끈을 함부로 끊고 싶지 않은 유일한 사람 중 하나였다. 어지러운 정신을 가까스로 추스르는 중에, 이 요원들은 사람 하나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양 조금의 감정 변화 없이 대화를 이어간다.


"일이 어렵게 됐어. 그 꼬마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사로잡기가 쉽지 않을 텐데 말이야."

"우리가 반위상파 보내는 훈련을 하지 않았다면 그 꼬마에게 꼼짝없이 당할 뻔했어."

"페드로의 선견지명이었지. 막심의 능력 일부를 가져올 수 있었으니..."

"막심을 귀화하게 만든 건 잘한 일이야."

"막심이 직접 나서면 일이 쉬워질 텐데, 왜 부르지 않는 거지?"

"러시아에서 일을 하나 처리하고 올 거야. 그동안에는 우리가 해내야 돼."


그중 한 남자가 손가락으로 지시하자 그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다. 그들이 말하는 반위상파는 나의 뇌파를 방해하는 파동을 말하며 내가 증폭시킨 뇌파와 반대 위상을 가진 뇌파를 보내어 그 진폭을 상쇄시킬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 그것은 마치 노이즈캔슬링과도 같은 기술일 것이다. 어찌 되었건 그들도 뇌파를 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고, 반위상파를 사용하는 한 내 염력은 그들 앞에서 무용지물이다. 지금은 그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하다. 반위상파에 대한 대책 없이 아저씨 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나방이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도 같다.


나는 일부러 산길을 피해 나무와 덤불을 헤치며 정신없이 움직였다. 야산이라고는 하나 길이 아닌 데로 이동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산의 굴곡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며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나무숲에서 빠져나오니 탁 트인 돌밭 사이로 계곡이 흐른다. 물을 마시러 머리를 숙이자 나무에 긁혀 여기저기 상처가 난 얼굴이 보인다. 세수 겸 찬물을 들이켜니 몽롱했던 정신이 바짝 들고 배에서 꼬륵 소리가 난다. 어제 점심 이후로 제대로 먹지 못했다. 빨리 마을을 찾아 뭐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계곡을 따라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계속 걷는다. 어느덧 산아래 마을에 이르러 작은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주인아주머니가 손님 맞을 해장국을 한 솥 끓이고 있다. 그 앞에 서서 주머니를 뒤져보니 돈이 없다. 어찌할 바를 몰라 물끄러미 국솥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그런 나를 흘끔 보더니 말한다.


"해장국 먹으려구?"


모르는 마을에서 무전취식할 정도로 용기가 있지는 않았다. 눈은 국솥에 고정되어 있고 고개만 좌우로 어색하게 흔드는 내 모습에서 뭔가 알아챈 아주머니가 말한다.


"왜, 돈이 없어?"


그 물음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창 클 나이에 배를 곯으면 안 되지. 이리 들어와라."


상처투성이 얼굴과 흙이 묻어 더러운 입성을 보고 끼니를 제대로 못 챙기는 아이라 생각한 것 같다. 미안한 마음에 조용히 식당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아주머니가 밥이 말아져 있는 뚝배기를 깍두기와 함께 내었다. 아직 김이 펄펄 나는 국밥을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동안 아주머니는 창가 테이블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불만을 쏟아낸다.


"빌어먹을 놈의 나라가 애들 키우는 데는 관심이 없어. 지네들 패거리 싸움에나 정신이 팔려서. 잘 먹여야 잘 크지. 아직도 배곯는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시골 마을 조그만 식당에서 국밥을 파는 평범한 아주머니의 예사 넋두리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류의 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치고는 허리가 곧고 눈에 생기가 돌았다. 또한 나이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장터 아낙이 즐겨 입는 몸빼와 조끼, 머리에 쓴 벙거지 탓에 얼핏 아주머니로 착각했으나 생김새와 목소리는 누나 뻘이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게 은주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모두 돈에만 눈이 벌개 가지고... 고칠 능력도, 생각도 없고... 사람이 사람구실 하면서 살게는 해 줘야 할 것 아니야. 이건 개돼지 보다도 못한 취급을 하니... 정치하는 놈들이 저 모양이니 그 아랫것들은 주먹 좀 쓴다는 놈들이 날뛰고 선량한 사람을 괴롭혀도 보고만 있지."


그 누나는 국밥의 마지막 국물까지 들이켜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부드럽게 묻는다.


"부모님은 계시고? 어디서 헤매다 왔길래 몰골이 그 모양이니?"

"저는 삼촌 집을 찾아왔는데 길을 잃었어요. 산속을 헤매다가 여기저기 긁혔네요."

"그래... 암튼 조심해서 가라. 이 동네에 어린애들 괴롭히는 양아치들도 많아."


내 말을 그다지 믿는 눈치는 아니다. 말 못 할 사연이 있으리라 내심 짐작하고 더 이상 묻지 않는 것 같다.


"감사합니다. 다시 와서 밥값은 꼭 지불할게요."

"됐다. 삼촌 집이나 잘 찾아가렴."


고마움에 몇 번씩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한 무리의 남자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대부분 달라붙는 티셔츠에 금목걸이를 한 걸 보면 아침을 찾아먹고 일 나가는 농부 같지는 않다. 누나가 어려움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식당 옆 담에 몸을 숨겼다. 정신을 집중하고 바라보니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그들의 행동으로 보아 좋은 의도로 식당을 찾은 것은 아니다.


말다툼이 시작된 듯싶더니 한 남자가 돌아서서 가려던 누나의 팔을 움켜잡는다. 나머지 세명의 남자들은 옆에서 낄낄거리고 서있다. 그 누나가 팔을 뿌리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잘 되지 않는다. 안 되겠다 싶어 식당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린다. 그들은 놀라서 나를 잠깐 훑어보더니 이내 무시하고 하던 짓거리를 마저 한다. 누나는 몸부림을 치며 악을 쓴다.


"놓으라고 이 나쁜 놈들아. 할 짓이 그렇게 없어서 힘없는 사람들 등쳐먹고 다니냐."

"등쳐먹다니. 여기서 편히 장사하는 게 누구 덕인데... 세금을 내야지.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우던가. 우리 형님하고 데이트 한 번 하면 이번 달 세금은 까줄게. 흐흐흐. 형님이 그렇게 구애를 해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니 애가 닳아서... 우리가 다 못 봐주겠잖아."

"이런 식으로 저질스럽게 나오는 데 호감 가질 여자가 있겠냐? 네 형님한테 가서 말해. 이럴수록 인간쓰레기처럼 보인다고."

"형님은 주제파악을 아주 잘하고 계시지. 가끔 말씀하셔, 자기가 쓰레기라고. 하하하."


양아치들한테 희롱당하는 누나를 빨리 구해야 한다 생각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누나의 팔을 움켜잡은 남자의 다섯 손가락이 점점 젖혀지더니 뚝하고 부러진다. 그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오른손을 감싼다. 나머지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옆에 서있던 팔뚝에 문신한 남자가 누나 쪽에서 무슨 이상한 짓을 한 줄 알고 그녀의 멱살을 잡는다. 누나가 켁켁거린 것도 잠시뿐, 그 남자의 다섯 손가락도 뒤집어지며 부러져나갔고 몸뚱이가 공중에 붕 뜨더니 이내 바닥에 메쳐진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머지 두 남자는 '귀신이다'하고 동시에 소리치며 잽싸게 줄행랑을 친다. 오른손을 부여잡은 남자와 바닥에 메쳐진 남자도 누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가게를 빠져나간다.


"누나, 괜찮으세요?"


그 누나는 알 듯 모를 듯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방금 네가 한 거니? 내가 비슷한 걸 하는 사람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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