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능력자
쫓기는 몸이라 학교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성진 아저씨 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더 위험하다. 반위상파에 대한 파해법을 찾기 전까지는 몸을 숨기며 도망 다녀야 한다. 이 누나한테 사정을 말하고 잠시만 있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해 볼까. 불쌍한 아이에게 국밥을 적선하는 너그러운 마음씨로 봐서 매몰차게 거절하지는 않을 것 같다.
"저기... 부탁이 있는데요. 지금 갈 데가 없어요. 삼촌 집은 거짓말이고… 나쁜 사람들한테 쫓기고 있습니다. 당분간만이라도 여기 있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무슨 일이라도 할게요."
그 누나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너, 장작 팰 줄 아니? 가마솥에 불을 피울 장작이 필요한데 네가 좀 만들어 주면 좋겠다."
감사합니다 하며 연방 머리를 숙여댔다. 누나는 가게 뒤쪽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아담한 집이 한 채 있었는데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운데 작은 마당을 둘러싼 'ㄷ'자형 한옥이다. 오래된 참나무향이 은은하고 주위를 둘러싼 낮은 돌담 너머로 수풀이 무성하다. 방은 중앙 마루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안방과 좁게 이어진 툇마루 양 끝에 하나씩 해서 모두 세 개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라. 청소 좀 하면 잘만 할 거야."
그 누나가 가리킨 곳은 담과 가까이 붙어있는 왼쪽 끝방이다. 댓돌에 신발을 벗어 놓고 방에 들어가니 천장은 낮지만 아늑했고 구석에 잘 개어진 이불과 베개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방 한쪽으로 창문이 나 있는데 멀리 빼곡한 전나무숲이 보인다. 방에 앉아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그 누나가 깨끗한 남자 옷을 한 벌 가져다주었다.
"씻고 갈아입어라. 집이 이래도 욕실은 리모델링해서 쓸 만 해."
대전에 가있는 엄마에게 전화하여 당분간 안전한 곳에 피해있겠다고 안심시켰다. 샤워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베개만 베고 누우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을 꼴딱 샜다. 누운 채로 갑작스레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해 본다. 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제천행 기차에 오르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다. 만약 그때 제천행 기차를 타지 않았다면 나는 남들보다 조금 모자란 아이로 평범하게 지내고 있을 것이다. 원래 그런 세상을 원망하면서 태어난 계급을 받아들이고 아빠에 대해서 알지도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성진 아저씨도 죽지 않았을 것이고 엄마가 멀리 피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 우주에서는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한 번의 선택이 내가 살고 있는 이 특별한 우주를 만들었다. 이 우주에는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다. 그것이 잘된 것이든 잘못된 것이든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한다. 선택에 책임을 묻는다면 이 세상에서 그 추궁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따지고 보면 평범한 우주도 사실 평범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나름 특별한 일들이 벌어지고 모두 각각의 의미를 가지며 우주의 작동원리는 그 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나의 선택은 그런 우주의 작동원리 속 일부분을 담당하며 우주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거리낌 없이 받아준다.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떤지 평가하고 그것을 잘못된 선택이라 폄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나의 특별한 우주에서 또 다른 특별한 우주로 옮겨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우주 속 무수히 많은 내가 무수히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이 선택을 하지 않은 나도 어디선가 나름 특별하게 살아가고 있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은 포만감에 스르르 눈이 감긴다. 꿈속에서 은주를 본 것 같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보니 창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갑다. 정오는 족히 넘었을 것 같다. 남자들의 웅성거림과 고함소리가 가끔 들린다. 가게 쪽에서 나는 소리다. 나는 혹시나 누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얼른 신발을 신고 가게로 향했다. 가게 안에는 공장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이 식탁 하나를 가운데 두고 우르르 몰려있다. 누나는 주방께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데 슬며시 웃고 있다. 궁금증이 발동한 내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윤활유 냄새가 빼곡하다. 누나가 나를 발견하고는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누나 옆에 가서 그쪽을 보니 두 남자가 마주 보고 앉아 팔씨름을 하고 있다. 내쪽을 바라보고 앉은 남자는 동남아 계열의 외국인인데 덩치가 산 만하다. 그 맞은편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으나 상대보다 많이 왜소한 것은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들 옆에는 돈뭉치가 놓여있다. 내기 팔씨름을 하는 것 같다. 옆에 서있는 군중들 중 한 명이 소리친다.
"자, 이제 더 걸 사람 없지요? 뚜언 쪽에 돈이 몰렸는데 만일 김반장님이 이기면 따블입니다."
어리둥절한 내가 누나를 돌아보니 그녀는 한 번 보기나 하라고 눈짓으로 테이블 쪽을 가리킨다. 조금 전 말을 한 남자가 심판을 자처하며 둘의 맞잡은 손을 감싸 쥔다. '시작'하는 구령과 함께 그 남자가 손을 뗐다. 뚜언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어간다. 상대를 잡은 손이 덜덜 떨리는데 어느 한쪽으로 움직이지를 않는다. 뚜언의 눈이 커지며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 이때 김반장이 '헛' 하고 힘을 쓰니 뚜언의 팔이 그대로 꺾여 손등이 바닥에 닿는다.
"얏호!"
여기저기서 김반장에게 돈을 건 사람들의 환호가 들린다. 뚜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게를 빠져나갔다. 심판을 보던 남자가 김반장의 승리를 선언하며 식탁 위에 쌓인 돈을 배팅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리고 나머지 얼마를 김반장에게 쥐어주며 엄지를 추켜세워 보인다. 김반장은 받은 돈을 작업복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때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이마에는 깊은 주름골이 여럿 나있고 구레나룻에서 이어지는 희끗희끗 더부룩한 턱수염이 검은 피부와 대비되어 그의 나이를 짐작케 한다. 아무리 어리게 보아도 환갑은 족히 넘긴 듯하다. 왼쪽 볼에 길게 그어진 꿰맨 자국이 세상의 풍파를 한 몸에 겪은 그의 고단한 이력을 말해준다.
이 한 무리의 남자들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공장의 작업자들이다. 이들은 거의 매일 이 식당에서 아침이나 점심을 먹고 가는데 누나에게는 이들이 유일한 고객이었다. 농업이 주 수입원이었던 이 마을에 감사하게 들어선 제조업이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제품 가격 경쟁 속에 우리의 공장들은 점점 도시에서 멀어졌다. 이런 시골에 처박혀 일을 할 사람도 대부분 젊어서 죽어라 고생하고 은퇴 후 노년을 즐겨야 할 나이 든 남자들이나 주변 개발도상국에서 날아온 형편이 어려운 가장들이었다. 그들은 공장 한 켠에 마련된 컨테이너를 개조한 기숙사에 기거하며 가족사진을 위안 삼아 고된 나날을 버텨간다.
돈을 딴 사람들이 김반장의 어깨를 주무르는가 하면 또 다른 무리는 서로 시끄럽게 떠들며 가게를 나갔다. 누나는 식탁 위 흩어져있는 빈 그릇들을 치우며 말한다.
"김반장 아저씨 대단하지? 조그만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는지..."
사실 나는 김반장이 힘을 쓸 때 뭔가를 느꼈다. 그 힘은 잘 단련된 근육의 단면에서 나오는 순수한 근력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뇌에서 발출 된 감마파였다. 나의 염력과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뇌파였다. 그가 어떻게 그런 능력을 쓸 수 있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누나에게 그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는지 물었다.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김반장 아저씨는 작년에 그 공장에 왔어. 어디서 왔는지, 그전에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더라. 단지 공장 사장 아들을 위험에서 구해준 인연으로 그 공장에 취직하게 된 걸로 알고 있어. 그리고 취직한 지 단 몇 개월 만에 반장이 되었고."
누나는 갑자기 생각난 듯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 당분간 한집에서 지내야 하는데."
"전 강민수예요."
"난 다온이야, 금다온. 좋은 모든 운이 다 온다는 뜻이지. 뜻은 그런데 실상은 잘 모르겠다."
"여기 있게 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공짜는 아니야. 장작 패오기로 했지?"
다온 누나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한다.
"김반장 아저씨 말이야. 사장 아들 구하는 현장을 내가 직접 봤거든. 열 살짜리 꼬마가 길을 가는데 앞에서 오던 트럭의 앞바퀴가 빠져 타이어가 그쪽으로 굴러오는 거야. 그 꼬마는 꼼짝없이 타이어에 깔리게 되었지.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무섭게 굴러오던 타이어가 갑자기 멈춰 선 거야, 그 꼬마 바로 앞에서. 그때 꼬마 옆에 김반장 아저씨가 있었고 그가 타이어를 한쪽으로 밀어 넘어뜨렸지. 사람들은 김반장 아저씨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아이를 감싸 안았다고,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구했다고 칭송했지. 그런데 그 이면에 다른 내막이 있던 거야. 그가 분명히 굴러오는 타이어를 눈빛만으로 세웠어. 나는 그걸 똑똑히 보았고.“
“누나의 짐작이 맞아요. 그는 염력을 쓸 수 있어요.”
“그걸 염력이라고 하니? 너도 그걸 할 수 있고?”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식탁 위에 놓인 반찬 접시를 공중에 띄웠다 살며시 제자리에 내려 보였다.
“신기하네! 초능력이란 게 정말 있었어.”
이 누나한테만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 내 능력이 입소문을 타고 나를 쫓는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되어 내 위치가 발각되더라도, 그로 인해 내가 위험에 빠지게 되더라도 그녀 앞에서 나를 숨기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내게 진심을 다해준 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