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공태양(17)

의남매

by Neutron

우리는 인사를 하고 공장을 나왔다. 가게로 돌아가는 길은 매우 깜깜해서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걸어야 했다. 누나는 평소에 배달용 오토바이를 타고 이 길을 다닌다고 했다. 오늘은 마침 그릇 양이 많아 둘이서 걸어오게 된 것이다. 해가 빨리 지는 초가을 밤 시골길은 짝을 찾는 풀벌레와 맹꽁이들의 구애가 시끄럽다. 밭 너머 민가에 띄엄띄엄 피어난 불빛이 아롱거리고 구름 뒤에 숨은 달빛이 아련하다. 건조하고 서늘한 바람이 목 뒤를 휘감으면 구수한 나무 타는 냄새가 실려온다. 도시에서 결코 느껴보지 못하는 열린 감각들이다.


"여기 걸어 다니기는 너무 무섭네. 민수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듬직하군."


다온 누나가 내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따스한 손길이다. 누군가 내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고 그 사람이 다온 누나라서 더 좋았다. 지금까지 나는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엄마가 어린 나를 돌봐주었고 은주가 모자란 나를 돌봐주었다. 그 둘은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은주는 내 마음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으나 그런 건 상관없다. 그녀는 누가 뭐래도 나의 헬레네이고 베아트리체였다. 태생이 양품인 그녀가 양품을 좋아하는 것을 탓할 수 없다. 내가 그녀의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그녀 잘못이 아니다. 그녀는 그녀의 기준에 맞는 멋진 양품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이런 생각이 들다가도 사람의 품질이 그런 잣대로 평가되는 게 맞는가 하는 물음에 직면한다. 그 평가 기준은 사람이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변해왔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 오래전에 신분이라는 천부적 지위는 사람 개인의 품질보다 혈통의 품질이 우선시되도록 했다. 신분이 철폐된 사회에서도 혈통이 건재하다. 부는 자신의 혈통에 부를 승계하고 보다 양질의 교육 기회를 독점한다. 엄밀히 말하면 양질의 교육이 아니라 자본을 투입해야 얻을 수 있는 특정 스킬을 기르는 교육이다. 한 방향으로 정렬된 교육 목표를 달성한 양품은 불량품들보다 비교 우위에 서고 부의 승계 확률을 높인다. 사회적 양품이 사회적 불량품에 비해 인간적 가치가 더 높을까? 인간적 가치는 그리 단순히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 잘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를 이상향이라고 한다면 양품의 인간은 조금 더 고귀한 무엇을 가져야 한다. 부와 지위 등 저차원적인 항목이 평가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온 누나를 지켜주고 있다. 못된 얼치기들로부터 곤경에 빠진 그녀를 구해주었고, 깜깜한 밤길에 의지할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것은 그 대상의 신뢰를 얻는 일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신뢰에서부터 시작된다면 우리의 관계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더 알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다. 나는 조금씩 다온 누나가 궁금해졌다.


"누나는 어쩌다 이 시골에서 혼자 장사를 하게 되었어요?"


다온 누나는 하늘을 보며 한숨을 길게 한번 쉰 후 말을 이어갔다.


"시골이 좋아서."


그녀는 예상과 다르게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대기업 연구소에서 근무를 했다. 대학 시절부터 혼자 시골에서 국밥 장사를 하는 엄마와 떨어져 서울살이를 했다. 엄마는 대기업에 취직한 장한 딸을 두었고 동네에서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었다. 손님을 맞을 때마다 딸 자랑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었다.


그녀는 어려운 형편에 딸 뒷바라지 하며 고생하는 엄마를 봐서라도 꼭 성공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회사 생활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의욕을 가지면 가질수록 절망이 커져 갔다. 신제품 개발 방향이 수시로 바뀌었다. 임원 한 마디에 원래 개발 취지와 시장 조사 결과는 묵살되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상한 제품이 탄생해 버리기 일쑤였다. 보다 못해 그 임원에 대해 쓴소리를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평가와 승진에서 뒤처지고 후배를 팀장으로 모시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 임원에게 찾아가 싹싹 빌고 꼬리를 흔들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임원을 혐오했다. 어느 날 협력 업체로부터 뒷돈을 받고 수주 물량을 준 그 임원의 비리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용감한 내부 고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사내 풍파를 일으킨 배신자의 낙인이었다.


퇴사를 고민하던 중 갑자기 엄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고향에 내려와 엄마를 고이 묻고 나니 서울로 돌아가기 싫어졌다. 엄마가 남긴 유일한 유산을 지키고 가업을 잇고 싶었다. 권위가 만연하고 누군가를 잔인하게 짓밟아야만 올라갈 수 있는 사회로 복귀하기 싫었다. 그래서 정글 같은 회사를 떠나 매일 국밥을 끓이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갔다.


"나는 대기업에 취직하면 인생이 살만하고 편해질 줄 알았어. 그 목표로 죽어라 공부도 했고.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다 허망한 신기루 같아. 대기업 명함을 들고 다닐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해."


살짝 눈웃음을 흘리는 다온 누나의 얼굴은 은주와 많이 닮았다.


"이제 네 얘기 좀 해볼래? 누구한테 쫓기는 거니? 또 그 능력은 어떻게 갖게 된 거니?"


어렸을 적부터 꾼 꿈 이야기와 고장 난 시계에서 나온 쪽지, 성진 아저씨와 CIA 사람들, 국정원에서 탈출한 이야기, 성진 아저씨의 죽음 등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하지만 아빠의 연구 결과물이 어디에 있는 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온 누나는 내 능력보다는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관심과 염려가 더 컸다.


"아저씨 일은 안 됐다... 무서운 사람들과 엮여서 고생이 많구나. 어서 빨리 그 파해법을 찾아야 할 텐데."


잠시 생각하던 다온 누나가 활짝 웃으며 말한다.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의남매를 맺으면 어떨까? 너도 누나가 없고 나도 남동생이 없으니 서로 누나 동생이 되면 좋잖아?"


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우리 남매는 구름이 걷힌 후 별이 쏟아지는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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