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공태양(19)

살인

by Neutron

김반장은 나를 옆에 앉혀놓고 조금 전 상황을 설명했다.


"너도 봐서 알겠지만 사람은 자기 자존심에 타격을 입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이성을 잃게 된다. 당하는 쪽은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가 작동해서 상대를 공격하지. 특히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사람한테 자존심을 긁히면 그 영향은 배가 된다. 평소에 최부장을 관찰해 본 바로는 그가 감정을 제대로 조절할 만한 능력을 갖지 못했다. 내가 설계를 바꾸라고 요구한 것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고 그의 공격적 행동이 충분히 예상되었지. 내게 심한 말을 쏟아낼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개인적으로 당하는 수모보다 회사의 손실이 더 큰 문제였지. 개인적 수모는 나 하나의 문제로 끝나지만 불량품으로 회사에 손실을 입히는 것은 모든 직원들의 문제다. 그 불량품으로 인해 회사가 어려워져 감원을 해야 할 수도 있고 그러면 회사를 나간 직원과 그 가족들은 곤경에 처하게 된다. 잘못된 설계를 방관하는 것은 회사에 피해를 주고 선량한 직원들을 어려움에 처하게 하는 범죄에 대한 미필적 고의다."


김반장의 말에는 사고의 고된 연마와 오랜 사색을 거쳐야 가질 수 있는 깊이가 있다. 그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대학만이 사람의 깊이를 만들어주는 길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민수라고 했지? 너는 꿈이 뭐니?"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이 없는 질문이다. 어렸을 적 나는 꿈이란 게 없었다. 가난한 집안, 모자란 머리, 특별할 것 없는 성격 등 뭐 하나 잘난 것 없는 나는 평범한 삶만 영위해도 성공한 거라고 생각했다. 자라면서는 평범한 삶도 쉽지 않은 목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처럼 육체노동에 찌들어 하루를 살아가는 삶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 모습의 전부였다. 그러나 성진 아저씨를 만나고 나서 모든 게 변했고 아빠의 선물로 남들보다 우월한 정신 능력과 신체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나의 꿈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본다. 내가 조금만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은행의 돈을 훔칠 수도 있고, 남의 은밀한 치부를 약점 잡아 협박할 수도 있다. 조직을 만들어 깡패 두목이 될 수도 있고, 그 힘을 이용해 온갖 나쁜 짓을 하며 부를 축적할 수 있다. 부자가 되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지금의 내게는 달성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누나는 기술을 배워서 나중에 장인이 되라고 했지만 그것이 정말 내가 바라는 미래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뭘 하고 살아가는 게 가장 가치 있을까요?"

"보통 사람들은 내가 뭘 하고 싶다, 뭐가 되고 싶다, 이런 꿈을 가지는데. 그런데 넌 다른 이야기를 하니, 특이한 면이 있구나. 가치 있는 삶을 찾기란 쉬운 게 아니지. 무조건 남을 위해서 산다고 가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건 더더욱 가치 있는 삶이 아니지."


김반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을 잇는다.


"어떻게 살던 중요한 건 네 행복이다. 세상이 살아갈만하다고 느끼는 게 중요하다. 어떤 이들은 돈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맹신하지만 돈이 전부는 아닐 거다. 인간은 아주 복잡한 동물이라 행복을 느끼는 동기가 다 다르지. 그걸 찾아가는 게 인생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분명한 건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에 배움이 빠지면 안 된다. 배우면 배울수록 경험하면 할수록 시야가 넓어지고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확률도 높아진다. 사회 경험도 좋지만 지금 네 나이에는 학교에서의 배움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공장에 온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다만, 결코 배움의 끈 만은 놓지 말아라."


마치 아들에게 충고하듯 애정이 묻어나는 조언이다. 그런 김반장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존경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미 학교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단정지은 나지만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래도 내가 아직 모르는 무언가가 거기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누나의 가게로 돌아오는 길이다. 언제나처럼 양옆으로 참나무가 빽빽하게 자란 낮은 언덕길을 걷고 있었다. 저 멀리서 누군가 내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인다. 그가 내 가까이에 도달하자 나는 그가 내게 칼을 던진 깡패 두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내 앞에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학생, 이런 말 하면 염치가 없는 걸 알지만... 나를 좀 도와줄 수 없겠나? 동생들이 죽을지도 몰라."


깔끔하던 양복은 이미 흙투성이가 되었고, 얼굴에는 온갖 상처가 나고 멍이 들었다. 아무래도 조직 간 싸움이 벌어진 모양이다.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 애원하더니 급기야 울음을 터뜨린다.


"이번 한 번만 도와줘. 내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 불쌍한 동생들을 구해줘."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조직 간 싸움에 끼어들 생각 없어요."

"이건 조직 간 싸움이 아니야. 우린 조직이 없어. 그냥 동네 형 동생 하고 지내는 사이야. 그 놈들이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자기네 밑으로 들어오라며, 거절한 우리를 두들겨 팬 거라고. 어쩌면 지금 잡혀있는 동생들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지도 몰라."


들어보니 큰 조직이 동네 양아치들을 흡수하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 과정에서 싸움이 났고 동생들이 잡혀있는 것 같다. 깡패들의 싸움이나 하는 짓들이 잔인해서 그 동생들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것은 사실이다. 누나와 내게 몹쓸 짓을 한 놈들이지만 그래도 불구가 되는 것은 너무 심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어디에 있어요?"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더니 그는 나를 이끌고 앞장서 갔다. 그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공장으로 지으려다 만 폐건물이 나왔다. 그 안을 들여다 보니 네 명이 쓰러져 있고 또 네 명이 그들 주위를 둘러싸고 서있다. 그 바로 옆에 혼자만 의자에 앉은 사람이 있는데, 보스 같아 보인다. 서있는 사람들은 모두 손에 각목을 들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이 쓰러져 있는 한 명을 각목으로 내리쳤다. '으악!' 비명 소리를 내며 맞은 남자가 꿈틀거린다. 누나의 멱살을 잡다가 공중에서 내쳐진 그 사람이다.


"상문이 어디 있어?"


쓰러진 남자가 대답을 못하자 각목을 든 남자가 다시 한번 내리친다. 이번에는 미동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기절한 것 같다. 나를 데리고 온 남자가 나지막이 말한다.


"저기 서 있는 놈들의 손과 발을 꼼짝 못 하게 해 줘. 그 사이에 내가 동생들을 구해 올게."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걸어서 동생들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가 다가오는 그를 발견하고 쉰 목소리로 외쳤다.


"정상문! 어딜 도망갔다 이제 나타나냐? 동생들이 죽어도 상관없나?"

"형님이 너무 막무가내로 덤비니까 무서워서요. 숨 좀 고르고 왔습니다."


그는 나를 돌아보며 신호를 주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그들의 손과 발을 묶어두었다.


"어! 왜 이러지?"


서있는 남자들이 발을 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사이 정상문은 동생들을 모두 피신시켰다. 동생들이 서로를 들쳐업고 부축하며 멀리 피할 때 까지도 정상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동생들을 먼저 챙기는 그의 마음이 아주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정상문이 빙그르 한 바퀴 돌며 춤을 추는 듯하더니 각목을 들고 서있던 남자들이 모두 푹 고꾸라졌다. 바로 다음 순간, 정상문은 어느새 앉아있던 남자의 가슴을 쑤셔대고 있다. 앉아있던 남자의 눈이 뒤집어지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모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쓰러진 남자들은 모두 목에 깊은 칼자국이 나 있고 그 사이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도대체 몇 번을 찔렸는지 옷 앞섶이 모두 피로 물들었다.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내게 정상문이 한 자는 돼 보이는 피 묻은 칼을 손에 든 채 다가와 인사를 했다.


"학생은 우리 은인이야. 우리의 절을 받아라."


정상문과 그 동생들이 내 앞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한다. 나는 얼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당신... 사람을 죽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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