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학교에서의 경험

by Neutron

필자는 운 좋게도 회사의 지원으로 해외에서 주재원 생활을 했었다. 주재원의 자녀들은 현지 국제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며, 그 학비는 모두 회사에서 지원되었다. 그 덕에 우리 아이는 두바이에 있는 영국계 국제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영어, 수학 등을 공부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그 공포스러운 수학 학습지를 그만둔 지 1년여 후였다. 그곳에서 배우는 수학은 한국과 비교하면 기초적이고 매우 쉬웠다. 그 학교에는 아랍계, 유럽계, 미주계, 아시아계 등 전 세계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이 있었다. 그중에 한국 학생들의 수학 성적이 제일 뛰어나다고 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한국에서 구x 학습지 같은 지옥훈련을 통해 성장한 학생들이고, 단답형 평가에 특화되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우리 아이는 그때까지만 해도 수학에 큰 흥미가 없었다. 너무 쉬운 교과 내용이기에 별 노력 없이도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었다. 나도 회사 업무가 너무 바빠서 아이의 학습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학교 숙제를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수학 숙제였다. 중학교 수학은 내게는 껌 씹는 일만큼이나 쉬운 것이어서 아이가 물어보는 어떠한 문제도 30초 안에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가 물어보는 내용을 들여다본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생활 속 또는 주변에서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쓰인 사례를 찾아보고 그 사례의 해답을 직접 계산을 해 보아라' 하는 것이 숙제였다.


지금까지 수학을 공부하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였다. 주어진 조건에서 정답을 찾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숙제를 완성하려면 피타고라스 정리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필요하겠구나. 그 정리를 이해하는데 학습지 문제를 몇 십 개 푸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갔다.


그때부터 필자는 아이와 함께 그 문제에 빠져들고 말았다. 주변에 직각삼각형이 무엇이 있으며,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용하여 무엇을 알아내는 것이 필요할까? 피타고라스 정리는 다 아는 것처럼 직각삼각형에서 직각을 낀 두 변의 길이를 각각 제곱하여 더한 값은 빗변의 길이의 제곱과 같다는 것이다. 기하학에서 너무 자주 쓰이는 정리이다 보니 당연하게 여겨졌던 수식이었다. 정말 단 한 번도 주변 사물에 피타고라스 정리를 적용해 보려는 시도를 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 주변에는 피타고라스 정리가 필요한 부분이 많았다. 가장 흔한 예로, TV의 크기를 말할 때의 30인치, 40인치는 화면의 대각선 길이이다. 그러면 가로와 세로의 길이를 어림잡을 수 있고, 4:3 또는 16:9의 화면 비율에 따라서 가로의 길이와 세로의 길이가 결정된다. 피타고라스 정리를 적용하면 16:9 비율의 40인치 TV의 가로길이를 구할 수 있고, 거실에 놓을 그 길이에 맞는 장식장을 준비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생각난 것이 터널을 뚫을 때 걸리는 시간에 관한 것이었다. 대개 산이 있는 곳에 길을 내기 위하여 터널을 뚫는다. 산의 높이와 빗변의 길이는 밖에 드러나 있으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이 잴 수 있다. 하지만 터널의 길이는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사람이 잴 수 없다.


그림. 산 아래로 터널을 뚫을 때 터널의 길이 계산


그림과 같이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용하면 산의 빗변과 높이를 알고 있을 때, 터널의 길이를 계산할 수 있다. 터널의 길이를 알고 하루에 굴착기로 뚫을 수 있는 거리을 안다고 할 때, 터널 공사가 모두 며칠 만에 끝날 것인지 계산해 낼 수 있다. 물론 구멍만 뚫는다고 터널 공사가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공사에 걸릴 시간이 예측 가능해져서 공사 전체의 예산을 짜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이는 이 터널의 공사 기간에 관한 내용으로 과제물을 만들었고, 선생님한테 칭찬을 받았다고 했다. 물론 그 과제를 수행하면서 우리 아이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완벽히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알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시절에 이러한 숙제는 상상도 못 했다. 교과서 연습문제 몇 페이지에서 몇 페이지까지 풀어오기가 숙제의 전부였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으나, 학교, 학원에서 허덕이는 아이들을 보면 주입식 교육이 예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겠다 싶다. 1980년대 고교생들에게 '수학의 정석'이라는 책은 바이블이었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교과서로 수업을 하지 않고 이 책으로 진도를 나가기도 했다. 이 참고서는 수학 교과 과정에 있는 단원별로 여러 유형의 문제들을 선별해 놓고 그 문제들을 푸는 표준(Standard)을 마련해 놓은 책이었다. 한마디로 모범 답안을 제시해 놓은 책이었다. 한국 교육 제도 아래에서는 이 책을 제대로 공부한 학생이라면 수학 성적이 나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한국의 고교생이라면 공부를 잘하던 못하던 그 책 한 권은 가지고 있어야 했으며, 책의 저자는 그로 인해 많은 돈을 벌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한 수학 선생님은 이 책에 있는 문제들을 몇 개 칠판에 써놓고 학생을 무작위로 골라 풀게 하였다. 시간 내에 못 푼 학생은 엉덩이에 불이 나야 했다 (그 당시만 해도 학교에서 교사의 체벌이 묵인되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공포에 떨었으나, 일부 맷집에 자신 있는 아이들은 당당하게 매를 맞았다. 그 아이들이 수학이라는 과목과 그 과목 선생님에게 호감을 가지려야 가질 수 없는 환경이었다. 수학이 트라우마가 된 학생들도 많았을 것이다.


나도 그 책으로 공부하였으나 남들처럼 풀이법을 외우지는 않았다. 다만 단원 첫 부분에 요약되어 있는 기호의 의미와 활용을 기억하고 연습문제를 혼자의 힘으로 풀려고 노력하였다. 푸는데 한 시간, 두 시간을 꼬박 써야 하는 문제도 있었고, 아예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문제들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어렵다고 중간에 포기하고 풀이를 들춰보지 않는 것이다. 나는 문제와의 사투 시간을 나름 정해놓았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최소 3시간 정도는 투자하여 혼자 고민해 보고 그 이후에 풀이를 보는 것이다. 그러면 풀이가 자연스레 이해되는 것은 기본이고, 그 풀이 과정에서 나만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렇게 수학을 공부하면 너무 재미있다. 그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학문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 아이가 다녔던 외국 학교의 수업 내용에서 얻은 영감은 이러한 류의 글을 쓰는 데 매우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동안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비판을 해야 할지 몰랐으며, 다른 나라도 같은 상황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모든 나라의 상황을 다 겪어보지는 못했으나, 여러 국가, 여러 인종이 모여있는 국제학교는 지구촌 교육의 평균 정도는 될 것이라고 본다. 이 비싼 국제학교에서 제공하는 최고의 교육서비스는 아이들의 창의력을 길러주는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교육열만 높았지 실제로 제대로 된 교육을 우리 아이들에게 제공하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이 답답하기만 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포자가 늘어난다는 신문기사가 오늘도 나왔다. 우리 아이들이 수학이라는 재미있고 아름다운 학문을 포기하고 하나둘씩 멀어져 간다는 사실이 서글퍼졌다. 이제 은퇴를 몇 년 앞둔 나이가 된 필자는 회사를 그만둔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신이 생겼다. 바로 우리 아이들이 수학에 흥미를 잃지 않게 하는 일이다. 이러한 글들을 더 많이 쓰고 더 많은 부모들이 읽게 하여 그들의 인식을 바꿔나가는 일도 중요한 사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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