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교육의 현실
2023년도에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일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의사들의 파업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종합병원 월급 의사들의 연평균 수입은 2020년 기준 약 2억 6000만 원 정도이다. OECD 회원국 중 단연 1등이고, 일반 임금 노동자 평균 수입의 6배가 넘는다. 개원을 한 의사들은 목만 좋으면 1년에 수십억을 벌 수도 있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죽을힘을 다해 투쟁하는 소외된 노동자들의 파업이 아니라, 이 땅에서 상위 1% 안에 드는 기득권 집단의 파업이다. 더 심각한 건 파업의 이유다. 의료 환경을 개선하라든지, 약물의 오남용을 막는 법을 만들어달라든지 하는 게 아니다. 의대 정원을 늘리고자 하는 정부의 방침에 반기를 든 밥그릇 싸움이었다. 자신들의 파업 때문에 응급실을 전전하다가 목숨을 잃는 환자들을 눈도 꿈적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의사들의 업무 강도와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충분히 이해한다. 노동 강도로만 따지면 연봉 2억쯤은 그리 많은 수입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그 이상의 노동을 투입해도 의사들의 1/6도 안 되는 연봉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다. 그러나 의사들은 자신을 그 평범한 노동자들과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우리들은 남들이 못해낸 엄청난 노력으로 공부를 해 이 자리에 올라온 상위클래스이고 그 평범한 노동자들의 노동과 우리들의 노동은 질적으로 다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의사의 권리를 가진 사람은 소수여야 하고, 의사의 머리수가 많아지는 것은 우리의 기득권이 무너지는 것이라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대충 이런 논리인 것 같다.
의사라는 직업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매우 소중하고 거룩한 직업이다. 돈벌이를 원하면 회사 경영자나 제품 개발자가 되면 된다. 지금의 의사들이 경영대나 공대를 포기하고 의대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돈벌이라면 첫 단추부터 어긋난 것이다.
소위 엘리트 집단의 몰상식은 비단 의사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검찰은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정의는 사라진 지 오래고 심지어는 죄 없는 정권의 정적을 죄를 만들고 덮어씌워 범죄자로 만들어 버린다. 법이 허용한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하며 스스로 사냥개가 된다. 더 큰 문제는 창피함을 모른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죄목을 뒤집어 씌운다. 그렇게 정치적 정적을 하나둘씩 제거해 나간 검사에게는 고속 승진이 보장된다. 이들은 사회 정의의 수호라는 거창한 구호는 잊은 지 오래다. 정의를 수호하라고 준 권한과 권력을 불의를 행하는 데 쓰고 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필자는 그 원인을 우리가 그토록 자랑하는 교육에서 찾고자 했다. 대한민국의 교육열은 세계가 알아준다. 이런 교육열이 있었기에, 천연자원이 하나도 없는 나라에서 기적을 만들어냈다고들 한다. 교육에 투자하고 교육에 집중하는 것은 너무나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교육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이게 제대로 된 교육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된다. 나름대로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나열해 보겠으니 공감이 된다면 함께 고민해 보자.
첫째, 철저한 상대평가다. 너 공부 잘하니? 반에서 몇 등 하니? 몇 점 받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몇 등하는지가 중요하다. 학업성취도 대신 경쟁우위가 척도다. 반에서, 전교에서도 모자라 전국에서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운다. 대학은 서열화되어 있고 내 점수로 갈 수 있는 대학과 과가 정해져 있다. 그래서 나보다 점수가 낮은 학생은 나보다 서열이 높은 학교에 가면 안 된다. 여기까지, 이게 뭐가 문제지?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 시스템에 너무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한 경쟁 시스템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이미 체득되어 있다. 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는 말로 설득당한다. 과연 그럴까? 경쟁이란 하나의 가치를 좇는 사람들끼리 싸워서 우열을 가리는 행위이다. 나는 이 것을 너는 저 것을, 서로 다른 가치를 목표로 좇는 사람들 사이에는 경쟁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선택한 가치를 공동으로 좇는 사람들 간에는 경쟁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선택한 자발적인 경쟁이고, 이런 경쟁이야말로 사람의 수준을 높여준다.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장점이 있고 좋아하는 분야가 있다. 글을 쓰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있고, 남의 말에 잘 공감하고 남을 배려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이러한 개개인의 숨어있는 능력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동일한 잣대로 학생을 평가하고 그 잣대에 미치지 못하면 열등생이라고 낙인찍는다. 반면 무엇을 시키던 성실하게 잘 따라오는 학생은 우등생이라는 호칭을 준다. 우등생은 열등생을 깔보고 자신과는 다른 하위 계층의 존재라고 여긴다. 사람들 간의 경쟁은 사회에 나와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회사는 경쟁사와 경쟁해야 하고, 운동선수는 메달을 따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이런 경쟁은 불가피한 경쟁이다. 그 집단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경쟁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교육 경쟁에 뛰어들었는가?
학생들 간 경쟁이 치열하다고 악명 높은 나라들에는 중국, 미국, 일본, 한국이 있다. 이 중에 교실을 전쟁터라고 표현한 학생의 비율은 전 세계에서 한국을 따라올 수 없다고 한다. 한국 학생의 81%가 여기에 동의했다. 입시 지옥이라고 매년 뉴스에 나오는 중국조차도 그 비율이 40%밖에 되지 않는다. 프랑스의 르몽드는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하여 심층 취재한 뒤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한국 학생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불행하다. 너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심지어 학교 안에서도, 이러한 경쟁이 학생들의 수준을 높이는 길이라고 둘러댄다. 학생들의 수준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곳에 미쳐서 한 분야를 파고들 때 올라가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아는 바보의 수준이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둘째, 죽은 지식을 주입시킨다. 국영수를 잘하는 학생을 똑똑한 학생이라고 한다. 그들이 과연 정말로 국어, 영어, 수학을 잘하는 것일까? 또 국어, 영어, 수학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국어를 잘한다는 것은 모국어인 한국어를 잘 이해하고 바른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영어권 사람들과 무리 없이 의사소통하고 영어로 쓰인 저널이나 논문 등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다. 수학을 잘한다는 것은 수학적 논리적 사고를 길러서 자기주장을 펴는데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다. 물론 국어학자가 될 사람, 영문학을 더 깊게 공부할 사람, 수학을 더 연구하고 싶은 사람들은 대학에 가서 보다 더 깊은 학문을 맛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기본 소양을 쌓아야 할 고교학생들에게 기본 이상의 지식을 암기하게 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가끔 유튜브에 영국 대학생이 수능 영어가 어렵다며 문제를 잘 못 푸는 영상이 올라온다. 이 영상을 본 한국 사람들은 어깨가 으쓱하면서 우리의 교육 수준이 높다고 자부심을 갖는가? 수능 영어를 만점 받는 학생들 중에는 외국인과의 대화가 불편한 사람이 분명히 있다. 기본은 안되어 있지만 점수는 잘 받는다. 기본 이상의 지식을 강요하고 우리는 이를 변별력이라고 부른다. 사실 우리 교육에서 암기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인터넷을 뒤지면 쉽게 알 수 있는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정답을 정해놓고 암기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을 걸러내는 것이 우리 교육이다.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문제를 풀도록 훈련되어 있어야 한다. 시험문제를 푸는데 사고력은 필요가 없다. 사고하는 순간 시간초과로 탈락이다. 문제 푸는 기계처럼 잘 훈련된 학생만 살아남는다. 이렇게 높은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한 명도 없을까? 노벨 과학상은 창의적인 사고로 인류의 과학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예이다. 남이 쌓아놓은 지식을 열심히 습득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 아니다.
셋째, 잘못된 교육관이다. 교육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필자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이다. 민주시민은 무엇인가? 이 사회의 주인으로서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한 사람들이다. 토론하는 법, 설득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경쟁하는 법, 남을 이기는 법을 먼저 배운다. 내가 조금 더 배웠고, 더 가졌다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되고, 인간의 등급을 나누면 안 된다.
이런 교육 시스템 아래에서 성장한 소위 엘리트라는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만들어가는 세상은 장밋빛이 아니다. 이미 그 결과물들이 한국 사회 여기저기를 병들이고 있다.
2016년 한국에서 벌어진 놀라운 일이 있다. 바로 현직 대통령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천만 시민의 시위였다. 광화문 광장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시위에 나선 인파로 가득 메워졌다. 모두 비선에 의한 국정 농단을 비난하고 심판하였다. 결국 국민들의 집단행동을 두려워한 국회에서 대통령의 탄핵안이 발의되고, 헌법재판소에서 가결되었다. 2024년 지금,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의 무능과 오만함으로 정치는 후퇴했고, 서민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2016년 대통령 탄핵을 외치던 때보다 나라가 망해간다는 위기감이 더 심했으면 심했지 못하지 않다. 그러나,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2016년에 비하여 현저히 적다. 평화적 민주시위로 불법을 저지른 대통령을 끌어내린 위대한 민주시민들이 다 어디 가고 왜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생각해 내느라 매우 힘들었으나, 2016년 어느 고등학생의 인터뷰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 학생은 비선 권력자의 딸이 부정한 방법으로 소위 명문대에 입학한 사실에 매우 분노하였다. 자신은 그 학교에 가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는데, 권력자의 딸은 말 한마디로 입학처 교수가 부정을 저지르게 하고 입학이 허가되었다는 것이 이유이다. 그런 사유로 거리를 뛰쳐나온 것은 학생들 뿐이 아니었다. 학부모들 또한 분노하며 시위에 참여하였다. 학생들은 SNS를 통해 지인과 친구들에게 광장에 모일 것을 공지하였다. 네트워크는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고 광장에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이게 되었다.
2024년의 대통령은 입시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다. 어쩌면 입시 부정보다 더한 독재자의 횡포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대한민국을 무너뜨릴지 모른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오로지 내가 들어갈 명문대에 누군가가 편법을 써 나 대신 들어가는 것에만 분노할 뿐이다.
대한민국이 이룩해 온 기적과 같은 눈부신 경제성장은 일본을 베끼고, 미국을 베껴서 가능했다. 여기에는 창의성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목표를 정해 놓고 영혼을 갈아 넣는 노력으로 막대한 노동 시간을 투입하여 이룬 성과다. 성실, 근면함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그렇게 키워진 경제적 덩치는 이미 세계 10대 경제 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다. 청출어람하여 경쟁사들을 모두 제치고 세계 1등을 하는 상품들도 많아졌다.
그러나, 그다음이 문제다. 여기서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신사업을 계속 개발하여야 하는데, 이제 참고할 경쟁사가 없다. 이제부터는 창의성이 매우 중요하고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시도해 보지 못한 길을 가야만 한다. 그래야 지속 성장이 가능하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교육은 창의성을 죽이는 교육이다.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교육이다. 영원한 번영을 누릴 것 같았던 삼성전자가 휘청거린다. 부가가치가 높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업을 찾지 못한 채 반도체에만 목을 맨 결과이다. 물론 경제 발전의 원동력을 창의성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창의성도 필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경제 발전은 민주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민주화가 잘 되어있는 나라일수록 경제 발전이 수월하다. 자율과 책임을 기반으로 남과 더불어 함께 사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이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언제든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 국민들의 역량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으로 떨어지면, 민주주의는 무너지게 되고 독재자에게 권력을 넘겨주게 된다는 사실은 주변국들의 사례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제 대한민국의 교육은 민주의식과 창의성을 기르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민주의식은 비판정신에서 나온다. 그래야 독재자와 미디어의 프로퍼간다에 속지 않을 수 있다. 교육의 목표가 순종적인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육의 목표는 비판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 (비판과 비난을 혼동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창의성은 사람마다 다르게 분출된다. 그 능력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천편일률적인 지식의 습득에서 모두가 존중받고 비판적 사고를 기를 수 있는 교육으로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