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쌓이지 않는 이력
R&R이 바뀌는 것은 곧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내가 이 회사에 평생 뼈를 갈아 넣지 않는 이상, 회사가 향하는 장기적인 방향은 내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이곳에서 최소한으로 쌓고 나가면 되는 경험에만 초점을 맞추면 될 뿐이다. 그러나 그 단기적 경험마저 당최 쌓이지 않았다. 이게 결정적인 문제였다. 구직시장에 다시 들어와서 나의 마켓 벨류를 높이기 위한 문장들을 쌓아가 보려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그 마저 안 될 것 같다는 결론이 났다.
2. better 보다는 'fit'의 문제
처음에는 그래도 쌓이는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싶었다. 하지만 이곳의 구조와 조직 자체가 향하는 방향이 나와 맞을지에 대한 의문은 점점 커졌다. '과연 이곳이 향하는 사업 구조, 방법, 조직 문화가 나와 맞을까. 내가 여기에서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에 대한 자신이 없어졌다.
3. 가치관으로부터의 '균형'
일하는 방식이나 역량보다는 오히려 나의 가치에 대해 더 깊게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페미니즘, 환경, 다양성, 젠더 감수성.. 기존의 나를 둘러싸던 환경과 전혀 다른 곳에 왔기 때문에 나를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탐구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이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이해는 커녕 인지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감히 말하건대 극에서 극, 이제 균형을 찾아갈 때였다.
4. 현실적인 '돈'
내 조금 이른 퇴사를 보고 "1년 채우고 퇴직금 받고 나오지" 하며 아쉬워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 과거의 선택과 그로 인한 경험을 후회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마침 남해관광문화재단에서 작년에 이어 남해바래길 디자인 추가 의뢰도 들어왔다. 차라리 이 일을 받아 퇴직금을 대신 하자 싶었다. 과거 업무에 대한 보상보다는 현재 업무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었다.
이래나 저래나 해도 입사를 한 것은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매달 배울 것은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매번 R&R이 바뀐 덕분에 전략부터 기획, 생산, 마케팅까지 두루 살펴보며 전반적인 기업 활동에 대한 감을 익힐 수 있었다. 그 후 퇴사를 한 덕분에 최고의 경험으로 남을 수 있었다. 창업을 한 번 해본 사람의 입장으로서 단언컨대, 회사 경험을 해 본 것과 해보지 않은 것은 가히 천지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