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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Apr 18. 2021

할머니가 문 앞에서 보낸 시간의 무게는 몇 킬로 일까?

부모님은 고스란히 간직한 은퇴자금과 낙지를 판 돈을 탈탈 털어 바닷가 근처로 이사를 했다. 아빠는 배 타러 가는 길이 가까워졌다며 싱글벙글 이삿짐을 옮겼다. 엄마는 집이 너무 산 중턱이라며 투덜대다가도, 집 앞에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기 위해 호미를 들고 매일 아침마다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2주간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부모님으로부터 초대장이 날아왔다. "밥, 한 끼 무러 오니라"


나는 무형광, 무색소, 데코 엠보싱, 천연펄프 3겹 두루마리 휴지를 들고 부모님 댁을 방문했다. 똑똑. 그런데 나를 맞아주는 건 엄마, 아빠가 아니라 할머니였다. 할머니도 엄마, 아빠의 집들이에 초대를 받았나보다. 할머니는 얇은 피부 가죽이 겹겹이 주름진 얼굴로 "어서 오이라, 잘 살았냐"라며 내 손을 꼬옥 잡는다. 살이 없어 쪼글쪼글한 손등을 빤히 바라보다, 나도 손을 맞잡는다 "오랜만이라 더 반갑네요, 할머니"


엄마는 여기서 지글, 저기서 보글 온통 지글지글, 보글보글 요리를 하고 있었다. 아빠는 어디 갔나 물어보니 "장 볼 때 느네 아빠 버섯을 안 사 온 거 있재, 버섯 사러 갔다" 바쁜 엄마 대신 할머니가 집을 소개해줬다. 뚜리번 뚜리번. 괜히 유리창도 열었다 닫았다 해보고, 불도 켰다 껐다, 화장실 물도 틀어봤다 꺼본다. 부모님의 황금 노년을 보낼 집이 부디 튼튼하길, 안전하길, 보드랍고 따뜻한 안식처가 되길 바랄 뿐이다. 그날 저녁 엄마, 아빠, 나, 그리고 할머니가 나란히 누워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하다 스륵 잠이 들었다. 잠결에 내 옆에 누운 할머니가 자꾸 내 쪽으로 이불을 넘기는 것 같았다.


다음날 엄마, 아빠는 주말에 먹을 식재료를 사러 마을로 내려갔다. 할머니와 나는 집에 오도카니 있었다. 얼마간 있다 심심해졌다. "할머니 저랑 산책 나갈래요?" 할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겉옷을 챙겨 들고 할머니가 일어섰다. "그라까? 어데? 어데?" 당장 나갈 태세를 갖춘 할머니를 보고 조금 당황했다가, 이내 내가 무심했음을 깨닫는다. 손녀에게 먼저 말하지 못한 거구나. 손녀가 말해주길 기다린 거구나. 함께할 시간이 필요한 거구나. 할머니도 조금 외로웠구나. 그렇게 할머니랑 길을 거닐며 '곧 봄이 오겠구나', '쉬어가자' 따위의 말을 했다. 물론 할머니와의 산책길에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거 나름대로도 꽤 괜찮은 시간이었다.


짤막한 산책을 끝내고 집에 도착했지만 엄마 아빠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띡띡 디지털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나는 새삼 놀란 눈으로 할머니를 쳐다봤다. "여기 비밀번호 공삼일팔 하고, 여기 여짝 밑에 요거슬 눌러" 마지막으로 우물정자를 누르니 띠리릭 문이 열렸다. 할머니가 너무 비밀번호를 크게 말하지 않았나 주변을 둘러보다 집으로 들어간다. 엄마, 아빠가 없는 집에는 조용한 공기가 돌았다. 할머니는 피곤할 텐에 어서 쉬라며 나를 방으로 떠민다. 쫑알쫑알 종달새 같은 손녀가 아니라서 그게 미안할 뿐이다.


할머니와 함께 점심을 먹고 나니, 이모가 할머니를 데리러 왔다. 할머니는 내 손에 꼬깃꼬깃 돈을 올려놓는다. "네가 어렸을 적에 할머니 집 달력에다가 니 생일날 선물 사달라고 동글뱅이를 쳐놨었재. 할머니가 깜빡하고 아무것도 못줬는데. 그게 자꾸 생각이 나드라고. 이걸로 가는 길에 휴게소 들러 맛난 거 사묵어. 알째?" 한사코 거절하는 내게, 마음이 쓰여 그런다며 기어코 돈을 쥐어주고 간다. 손에 주어진 만 원짜리 다섯 장을 바라본다. 할머니는 기억력도 좋네.


그후로 엄마 아빠와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딸기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엄마는 깜빡했다며 서둘러 할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집에 잘 들어갔어? 내가 전화한다는걸 깜빡했네." 수화기 너머로 할머니가 우물쭈물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크게 말해봐, 뭐라고? 집이 아니라고?" 엄마는 할머니의 말을 듣더니 손을 부들부들 떤다. "엄마, 일. 칠. 일. 삼. 일. 칠. 일. 삼. 눌렀어?" 수화기 너머로 띠리릭하고 철컥하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집에 보일러부터 떼. 몸부터 녹여야 해. 아직 씻지 말고 집에 보일러부터 돌리소. 응. 응. 방이 뜨끈뜨끈 해지면 씻고 오소. 응. 내가 다시 전화할게." 잠시 후 전화가 끊기고 엄마는 두 다리사이로 고개를 푹 숙인다. 나는 엄마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어깨를 들썩일 뿐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엄마는 다시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씻었소?" 할머니는 엄마에게 뭐라고 말을 한다. "엄마, 왜 일찍 전화를 안 했어, 응? 엄마, 엄마 탓 아니야. 우리가 나이 들어가고 있는 거야. 엄마, 아니라니까. 무슨 시설이야! 엄마, 괜찮아. 지금 엄마가 우리 집에 놀러 오면서 비밀번호를 다른 거를 외웠잖아. 그러면서 헷갈린 거야. 그럴 수 있는 거야. 나도 간혹 가다 그래. 나이 들면서 한 번쯤 당연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엄마, 괜찮아." 엄마는 수없이 '엄마'를 외치며 할머니와 오랫동안 전화를 했다.


할머니는 이모 댁 근처 4층짜리 빌라에서 2층에 산다. 이모는 할머니를 집 앞까지 모셔다 드렸다. 말 그대로 집 앞까지. 비밀번호를 띡띡 누르는 할머니를 보고, 이모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 비밀번호가 잘못된 것은 추호도 모른 채. 할머니는 0318, 1317, 0317, 0713의 숫자를 눌러댔다. 공이 들어갔던 것 같기도 하고,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몇 번이고 셀 수 없이 번호를 누르다가 할머니는 이내 무서워졌다. 내가 치매면 어떻게 하지. 내가 자식들에게 또 짐을 주면 어떻게 하지. 할머니는 두려워졌다. 봄이 오기 전 칼 같은 바람이 휘잉 무서운 소리를 내는 그 겨울 계절에, 할머니는 현관문 앞에서 주저앉았다. 쭈그려 앉았다. 생각해보면 기억이 날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비밀번호가 떠오르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렇게 네 시간 동안 집 앞에서 쪼그려 앉아있었다. 집을 앞에 두고 현관문 앞에 바람을 맞으며 앉아있었다. 네시간동안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집 앞까지 할머니가 들어가는 걸 확인을 해야 하지 않았냐며 이모를 원망도 했다가, 이런 '나를 그냥 시설에 보내라'는 할머니를 다그쳤다가, 같이 모시고 살지 못하면서 전화로만 잔소리를 하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던 엄마. 엄마는 엄마를 생각하며 그렇게 밤새 울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바라보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도 오가며, 마음을 다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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