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당신의 손을 잡고 야구장에 갔습니다. 어릴적 야구장에 대한 안좋은 추억이 있다는 내게, 당신은 이유를 물었습니다. 저는 조용히 그 이유를 풀어보았습니다. 어릴적 우연한 계기로 마산에 있는 구장에 가게 되었고, 그날은 기아와 NC다이노스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날 NC구장 자리에 앉아있었고, 아빠는 열혈한 기아팬이셨습니다. 무수히 많은 NC팬들 사이에서 아버지는 열심히 기아를 응원했고, 저는 주변에 야유에 주눅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단 한 번의 과거 경험으로 미래를 전부 부정하는 것은 손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덧붙였습니다. 아이도 응원가를 따라부르다보면 소심한 성격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다는 말에, 더 솔깃하여 구장으로 향했습니다. 퇴근 후 피곤함에 눈이 절로 감겨왔지만 말이죠. 아이에게 유니폼을 사주겠다는 당신을 만류하진 않았습니다. 티셔츠 하나에 십만원이 훌쩍넘는다는 것을 알았으면 달랐을 것입니다. 그렇게 구장에 들어가니 무수히 많은 사람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이 목요일 오후 여섯 시였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저를 압도하는 엄청난 크기의 구장, 그리고 그 공간을 가득채울 만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에, 그 무엇보다도 매일 경기가 열린다는 그 말에 놀라고 말았습니다. 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내일 출근하는 사람은 없나요? 매일같이 경기를 챙겨보는게 체력적으로 가능한 부분인가요? 원정갈때 유니폼은 다르다고요? 아, 응원봉도 다르다고요. 경기 끝나는 시간이 확실하지 않다고요? 어쩔때는 자정을 넘어가기도 한다고요.
저는 내일의 피로를 감수하고서도 경기를 감상하는 이들의 마음이 무엇일까 고민해보았습니다. 과거 스포츠가 우민화 정책 중 일환이지는 않았나, 정치를 외면하게 만들고 현실에서 도피하게 만드는 수단이지 않은가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책으로만 스포츠를 접한 저의 천박한 사고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경기가 시작되고 뜨거운 열기 속에서 여러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응원을 하며 낯선 타인과 어깨동무를 하고, 부조리한 판결에 야유를 보내며, 즉석에서 조리되는 음식에 집에서의 노고를 잠시나마 잊고, 직장동료와 함께 경기를 감상하며 엎치락 뒤치락 서로간 상반된 의견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당신은 제 아이가 박치이긴 하지만 제법 응원을 열심히 따라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제 아이를 보았습니다. 경기 규칙은 잘 모르나, 옆 사람과 맞추려 부던히 노력하는 아이의 모습은 사회생활을 갓 시작하려는 한 명의 인간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외동인 아이는 그렇게 공空에서 공共을 익혀가고 있었습니다.
다만 저는 아쉬움이 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구장을 나서는 순간 그런 소속감은 사라지고 나는 고작 하나에 불과했다고 깨달았기때문입니다. 공(共)동의 장소에서 한 발만 벗어나면 혼자라는 공(空)백, 지독한 외로움말입니다. 결국 구장에 가는 이유 중 하나로는 외로움이지 않을까, 그리고 다음날 다시 구장을 찾는 이유 또한 외로움이지 않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와서 지쳐 쓰러지고, 다음날을 위해 일어설때 육체는 피곤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제의 환희가 오늘의 무게로 남아있었습니다. 그게 저는 어쩐지 허무했습니다.
결국 나는 고독한 타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동시에 군집 속에서 섞여 잠시나마 소속의 위안을 느끼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집단과 개인은 마치 양극의 자석처럼 서로를 밀어내고 끌어당기며, 끝내 한 몸을 이루려 하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동일한 응원가를 부르는데, 개인의 목소리를 내기란 쉽지 않은 법이지요. 이와 같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서는 균형을 잃기 마련입니다. 너무 깊이 속해버리면 나를 상실하고, 자신에게 너무 깊이 빠져들면 세상과 단절됩니다. 그래서 감히 당신에게 말해봅니다. 스포츠가 우리에게 허락하는 열광과 일시적 연대는 삶의 작은 축제이지만, 그것만으로 삶이 완성되지는 않는 것 같다고, 오히려 그 환희가 지나간 뒤에 찾아오는 공허와 고독이야말로 그 증거라고. 결국 연약한 개인으로서 타인과의 연대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있지만, 결국에는 누구도 대신 들어가 줄 수 없는 자기 내면으로 침전해야하는 시간이 찾아온다고. 그러니 함성과 소음이 모두 사라진 고요의 순간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정적을 고독으로 받아들이고, 오롯이 혼자서 내일을 살아내는 것이 용기일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러고나서야 야구장으로 향할때 진정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고 말입니다.